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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역사/유적/유적,유물,문화재

숭례문의 건축연혁과 양식

【명 칭】 서울숭례문(崇禮門,남대문)
【분 류】 성문
【지정사항】 국보 제1호
【소 재 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 29


《 (1) 숭례문의 건축 연혁 》

숭례문은 현재 국보 제1호로서 가장 중요시하는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도성 8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인데 그것은 문화재적 가치에 의한 것 이외에도 수도의 위치상으로 경복궁의 남쪽에 있어 도성의 관문일 뿐만 아니라 교통상으로도 가장 중요한 곳에 있기 때문이다.

남대문을 건축하기 시작한 것은 태조 5년 1월 도성을 쌓을 때부터이다. 월단(月斷)과 문루는 모두 기술과 시일을 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대체로 완성한 것은 동년 9월이었다. 그런데 1962년 남대문을 중수할 때 남대문 상량일자를 묵서(墨書)한대들보셋이 발견되었다.

첫째는 태조 때 창건 당시의대들보요, 둘째는 세종 때 개수 당시의대들보요, 셋째는 성종 때 개수 당시의대들보이다. 태조 때 창건 당시의대들보에는 ‘홍무이십구년병자시월초지일상량(洪武二十九年丙子十月初之日上樑)’[註]이라고 묵서되어 있다. 홍무 29년은 태조 5년에 해당하는 것이다.

태조 5년 도성의 제2차 공사를 완료한 것이 9월 24일이니 축성공사를 끝낸 지 12일 후인 10월 6일에 상량하고 2년 후인 태조 7년 2월 8일(을유)에 준공하였던 것이다.[註]따라서 숭례문은 태조 5년에 창건하였고 2년 후에 다시 개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태조 7년(1398)에 개건한 남대문은 세종 4년(1422) 도성을 개축할 때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고, 세종 30년(1448)에 개축하였다.

개축한 이유에 대하여 세종 15년(1433) 7월에 세종이 영의정 황희(黃喜)와 좌의정 맹사성(孟思誠) 및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한 권진(權軫)을 불러 여러 가지 국사를 의논할 때 세종은 다음과 같이 남대문 개축의 의사를 표현하였다.


「경복궁의 오른 팔의 산세는 낮고 확 트여서 포국(抱局)이 없는 까닭에, 남대문 밖에 못을 파고 문안에 지천사(支天寺)를 세운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남대문이 저렇게 낮고 평평한 것은 처음에 땅을 파서 편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 땅을 높게 돋우어서 산맥에 연(連)하게 하고 그 위에 문을 세우는 것이 어떤가.[註]」


이에 의하여 세종은 남대문이 기울거나 퇴락하여 개축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지대가 낮아서 볼품이 없고 또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에 구애되어 남대문의 지대를 높여서 남산과 인왕산의 산맥에 연결시켜 경복궁의 포국을 아늑하게 형성하자는 데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황희 이하 모든 대신들이 다 찬성하므로 곧 공사를 착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때 남대문 공사 뿐만 아니라, 강녕전의 개축, 경회루의 보첨 개수, 궁성의 북문 건축, 누각(漏刻)의 관후실(觀候室) 조성, 소격전동의 착지(鑿池), 혜정교천의 이착(移鑿), 가각고(架閣庫) 서변 개천의 석축(石築), 장의동의 착지, 내사복(內司僕) 오지(汚池)의 개착(開鑿), 남대문 외지(外池)의 석축 등 수많은 공사를 병행하게 되었으므로,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일시에 기공하는 것을 반대하고 풍년이 들 때에 하나씩 기공하여 민력을 휴양할 것을 청하므로 남대문 개축공사는 뒤로 미루어 15년 후인 세종 29년(1447) 8월에 착공하였다.

이 때의 공사는 좌참찬(左參贊) 정분(鄭蓬)이 담당하였는데, 남대문의 문루와 석문을 완전히 헐어내고 기지를 높게 돋우어 양쪽 산맥에 연결시킨 다음 그 위에 새로 석문을 쌓고 문루를 건축하였으므로, 보수나 중수가 아니라 완전한 개축이었다.

그러므로 실록에도 ‘신작숭례문(新作崇禮門)’[註]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공사는 세종 29년 8월에 시작하였으나, 그 해 11월에 일기가 매우 추우므로 사헌부의 계(啓)에 의하여 일시 공사를 중지하고,[註]이듬해 즉 세종 30년 봄에 다시 공사를 계속하였는데, 1962년에 발견된대들보가운데 ‘정통십삼년무진삼월십칠일손시입주상량(正統十三年戊辰三月十七日巽時立柱上樑)’[註]이라고 묵서한 것이 곧 이 때의대들보로서, 세종 30년 3월 17일에 상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준공일자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나 세종 30년(1448) 5월 12일 (병신)에 한재(旱災)로 모든 공사를 혁파할 때 남대문 공사는 이미 완성을 고하게 되었으므로 혁파하지 아니하였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써 이 해 5월에 준공된 듯하다.[註]

요컨대 남대문은 태조 5년에 창건한 뒤 그 지대가 낮아 볼품이 없고 또 풍수지리설에 구애되어 세종 15년 (1433)에 그 지대를 돋우고 문을 높게 건축하려다가 여러 가지 공사로 곧 착수하지 못하고, 세종 29년 8월에 비로소 착공하여 겨울에 공사를 쉬고, 다음해 즉 세종 30년 봄에 공사를 계속하여 3월 17일에 상량하고 5월에 준공하였다.

그 후 32년을 지나 성종 10년(1479)에 이르러 남대문이 기울어졌기 때문에 또다시 개축하였다. 세종 30년에 남대문의 기지를 흙으로 높게 돋우고 그 위에 석문과 문루를 건축하였으므로 기울어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종 9년 (1478) 3월 20일의 야대(夜對)에서 우승지 박숙진(朴叔?)이 아뢰기를


「고인이 말하기를 백성을 부릴 때에는 시기를 가려야 한다고 하였으며, 춘추에도 불시에 백성을 부리는 것을 비방하였습니다. 지금부터 농사가 한창인데 남대문을 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문이 크게 기울어지지도 아니하였으며, 또 공사를 일으킬 때도 아닙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다만 이 문이 심히 기울어졌기 때문에 개작하라고 한 것이다. 명일 다시 조사하여 만일 심히 기울어지지 아니하였다면 정지하겠다.[註]」


라고 한 기록이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성종 9년(1478) 3월에 남대문이 크게 기울어졌으므로 바로 개작을 명하였으나, 우승지 박숙진이 농시(農時)를 이유로 반대하고 또 다른 공사도 있으므로 마침내 개작을 중지하고,[註]이듬해 즉 성종 10년(1478)에 개작하였는데, 실록에는 이해 1월 17일 동부승지 채수(蔡壽)의 말 가운데 근일 장차 숭례문을 중수한다는 말이 있을 뿐이고,[註]착공 및 준공에 대한 기사는 없으나 1962년 발견된대들보가운데 성화십오년기해사월초이일묘시입주상량(成化十五年己亥四月初二日卯時立柱上樑)이라고 묵서한 것이 있음으로써 성종 10년(성화 15년) 4월 2일에 입주(立柱) 상량한 것이 확실하니 준공은 5월쯤 될 것이다.

이 때 채수와 좌승지 김승경(金升卿)등이 남대문을 중수함과 동시에, 중국의 예에 의하여 남대문 밖에 옹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였으나 채택되지 아니하였다.[註]

성종 10년에 건축한 남대문은 1961년까지 약 500년 간 존속하였다. 그러나 500년을 지나는 동안 월단의 석재 가운데 풍화작용으로 부서진 것이 많이 생기고 목재도 썩은 것이 많아 무너질 위험이 있으므로, 1962년 문루와홍예(虹霓)를 헐어서 중수하였다. 그러나 부서진 석재와 썩은 목재만 새 것으로 갈고 다른 것은 모두 옛날 것을 그대로 사용하여, 옛날의 설계 그대로 복원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숭례문은 도성 8문의 가장 중요한 문의 하나였던 그 옛날의 숭례문은 아니다. 그것은 이 문의 서쪽에 연결되어 있던 도성이 일제 침략자들에 의하여 1907년부터 헐리기 시작하였고 그 후 도시계획이라는 이름하에 문의 서쪽의 성곽을 완전히 헐어버리고 넓은 도로를 개설하였으므로[註]숭례문은 도로 한가운데 양날개를 잃은 새 모양으로 남아 있다.

또한 이 문은 폐쇄된 채 그 옛날과 같은 도성의 남쪽 관문의 기능은 찾아볼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주위에는 현대식 고층건물이 하늘 높이 솟아 있기 때문에 왜소하고 초라한 모습은 국보 제1호라는 문화재적 가치를 의심케 한다.

그러나 그 문화의 척도는 외형의 대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전통적인 정신세계에 있는 것이니 1936년 10월 준공 이후 몇 번의 개축을 하였으나 오늘날까지 590년을 지켜 온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특출한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좀더 완전하게 보존하여 자자손손 영원히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 (2) 숭례문의 건축 양식 》

숭례문의 건축 양식은 정면(하층) 5칸(70척 5촌), 측면 2칸(25척 6촌 5분)의 중층(重層)우진각지붕의다포(多包)집으로 건평 53.79평이다. 그리고 현존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건축 구조는 성벽보다 일단 높게 화강석으로 육교를 만들어 성로(城路)를 잇고 그 아래로 홍예를 틀어 대문을 내어 출입하게 하고 장방형(長方形) 육교 상면에 중층루(重層樓)를 세워 완성하였다.

중층 목조건물의 일종의 기단인 육교는 내외벽을 큼직한 선단석상(扇單石上)에무사석(武砂石)을 쌓아 홍예 기석을 받고 홍예 기석상으로부터 홍예석을 쌓아 올린 홍예 좌우로 크고 작은 무사석을 층층히 쌓아 이룩하였다. 이 무사석의 뒷몸은 길고 짧아적심(積心)과의 연계를 꾀하고 적심과 무사석은 칸칸이 서로 중첩하여 상호연계를 한층 더 견고히 하였다.

누는 이러한 기단 위에 지어졌는데 상층이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평면의 구성은 하층이평주(平柱)14개와고주(高柱)4개로 되고 상층은 근정전(勤政殿)에서와 마찬가지로 하층우주(隅柱)내곽에 따로 세운우고주(隅高柱)와 하층으로부터 올라오는 4개의 고주 그리고 병연주로 이루어졌다.

초석은 모두 융기부(隆起部)가 있는 원형이나 고주의 그것은 판석형(板石形)이고 우고주의 그것은 방주형의 것을 윗몸으로부터 말각(抹角)한 모양의 것이다.

아래층 축부(軸部)의 짜임은 기둥 아랫도리에 높직한 하방(下枋)이 있고 벽은 없이 기둥 윗몸에창방(昌枋)과평방(平枋)을 놓고주두(柱頭)를 놓아 내2출목, 외2출목의공포(慊包)를 조성하였다. 상층도 하층과 같으나 주간에 중방을 끼우고 조그만 판문을 연속하여 쭉 돌려 낸 것이 첨가되었다. 공포는 마찬가지의 내2출목, 외3출목, 공포의 세부 짜임은두공(頭工)위로삼제공(三提慊)이 겹쳐 놓이고 주간에서는 그 위에 바깥쪽으로 삼분두된 살미첨차가 놓여 외목도리를 받게 되었고, 기둥 위에서는 제공 위에 바로대들보가 놓이게 되어 그것이 외목도리를 받게 되었다. 보머리도 역시 삼분두로 의장하였으며이제공(二提慊)의 안쪽머리도 그렇게 하고 살미첨차의 뒷머리는 운각하여 변화를 주었다. 행공첨차는 두 끝으로 직절(直絶)하고 바닥을 둥글려 소위 고형 수법을 썼고 소로와 살미첨차 사이의 윗몸도 바닥에 따라 만곡부(彎曲部)를 넣어 당시 유행하던 수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고형첨차는 여말다포(多包)집의 유례 이래 각 건물에서 일반적인 통성(通性)으로 보이는 것인 바 이것 여하에 따라 시대의 설정을 추정하기도 하는 중요한 부재(部材)인 것이다.

쇠서의 곡선은 비교적 강직한 편이나 개성 남대문의 그것보다는 훨씬 곡선미가 짙고 홍화문이나 돈화문보다는 한결 경직(頸直)한 편이다.

가구(架構)는 상하가 동일한 방법이나 하층의 그것은 마루를 깔기 위한 수단에서 그쳤고 상층은 지붕을 구성하기 위하여대량(大樑) 위에 높직한동자주(童子柱)를 세워종량(宗樑)을 받고 종량에 중도리를 짜고 종량 위에 동자주형의대공(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얹었다. 이러한 수법은 개성 남대문과 동일한 것이나 개성 남대문의 동자주는 위가 좁아져 간 것이고대량아래에 따라 귀밀이한 방주(方柱)를 세워 보강을 한 것이 다르며 서울 남대문에서는대량과 종량 사이에 각재형(角材形)덧보를 이중으로 놓고 거기에 따로 뜬창방을 짜돌려 중도리를 보강한 것과고주(高柱)위로 동자주를 더 받쳐 종량을 보강하고 나아가종대공(宗臺工)을 힘있게 받도록 한 것이 그와 다르다.

양의 단면은 심원사(心源寺) 보광전이나 후기 홍화문 등에서 볼 수 있는 어깨는 그냥 두고 바닥만을 굴리는 수법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같은 시대로 보여지는 봉정사(鳳停寺) 대웅전 · 환성사(環城寺) 대웅전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명정문(明政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귀천장이 없고 하층의 그것도 홍화문 등에서와 같은 우물천장이 없고귀틀이 그냥 내보이도록 되어 있다. 2층의 마루는 장마루를 깔았다. 아래층은 모두 토간(土間)이나 중앙문 즉 홍예문의 천장 부분에만은우물마루를 깔았다.

지붕은겹처마, 각추녀마루에는용두(龍頭)와잡상(雜像)이 놓이고 양성한용마루끝에는취두(鷲頭)가 있다. 그런데 1961년도 중수공사시 여러가지 명문이 발견되고 고단청(古丹靑) 문양 등이 검출되었으며 이에 따라 숭례문은 당초 팔작지붕이었던 것이 후에우진각지붕으로 고쳐졌음이 밝혀졌다.

건물 주위에는여장(女墻)이 쌓였고 그 좌우 측면의 한쪽으로는 각기 통용문이 개설되어 있으며 여장내로 떨어지는 물은 석루조(石漏槽)를 통하여 모두 배수하게 되었다.

이 건물의 가치는 조선 초기의 성문 건축을 대표한다는 데 있다. 이 대표한다는 뜻에는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으니 하나는 시대적인 가치이고 또 하나는 건축사상의 가치이다. 전자는 서울에만도 대소 성문이 있으나 그초루가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것으로 조선 초기의 것은 이 건물이 유일한 것이어서 받는 각광이고, 후자의 경우에서는 개성 남대문을 본떠 지은 집이나 개성 남대문에서 이루지 못한다포(多包)집 성문의 표본을 여기에서 비로소 개화하였다는 점에 있다. 말하자면 임진왜란시 성내의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고, 불과 몇 개의 건물이 잔존하게 된 것 가운데 이 건물이 비교적 상세히 여말 이래의 다포집 양식을 충실히 남기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것이다.



출처 : [기타]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munwhasa/txt/text/3-4-1-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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