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지명유래(地名由來)-신계리(薪溪里)
외동읍 각 부락의 지명유래를 5개의 파일로 작성하였으나, 향우님들의 검색편의와 향리에 대한 친근감을 증대하기 위하여 법정리별(가나다순)로 다시 작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기사는 작성중에 있으니 추가할 것이나 수정할 것이 있으면 꼬리말 등으로 하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주요 출향인사의 경우 향리(자연부락)를 알 수 없어 기재하지 못하고 있아오니 정보를 아시는 향우님들께서 대신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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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계리(薪溪里)는 토함산 서쪽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불국사가 있는 불국동의 진현동과 외동읍 괘릉리(掛陵里)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일찍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온 반촌(班村)이며,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살아 왔기에 마을인심 또한 후한 것으로 잘 알려진 마을이다.
예로부터 충신(忠臣)과 효자(孝子)를 많이 배출했던 이 마을은 신도비 2기를 비롯한 서당(書堂), 정자(亭子), 재실(齋室) 등이 즐비해 한눈에도 예사 마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신계리(薪溪里)는 동쪽으로 토함산을 끼고 양북면 범곡리와 장항리에 닿아 있고, 서쪽은 구정동, 남쪽은 괘릉리, 북쪽은 불국동(佛國洞)에 접해 있다. 경주에서 이 마을에 가려면 7번 국도를 타고 울산방향으로 가다가 불국사를 지나 영지-불국사를 잇는 새로 난 영불로를 따라 좌회전하여 불국사 쪽으로 올라가면 오른쪽에 펼쳐진 마을이 신계다. 영불로를 지나쳐 다음 신호등에서 좌회전해서 올라가도 된다. 경주시청에서 이곳까지는 16km, 20분 거리이다.
본래 이 마을은 토함산 서쪽기슭의 구릉지로 섶이 많아 ‘섶’이라고 불리었다. 지금도 ‘섶에’, ‘서배(西培)’라는 지명이 남아있고, 윗마을은 ‘상섶’, 아랫말은 ‘하섶’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상신(上薪)’, ‘하신(下薪)’이 되고, 토함산에서 흘러내리는 여러 갈래의 도랑이 많았다 하여 ‘사드랫거랑’이 있어 ‘사드래’, ‘서드래’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이 마을이 ‘신계(薪溪)’라는 지명으로 바뀐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상섶, 하섶, 진현, 내동면 광산리 각 일부를 병합하면서부터다. 본래는 ‘상섶’, ‘하섶’인데 일제가 ‘신계’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원래는 ‘감산사’, ‘밤갓’(지금의 괘릉)도 ‘상섶’이고, 영지의 ‘영못안’도 ‘하섶’에 속했었다. 이 마을은 크게 ‘상섶’과 ‘하섶’으로 나누고, 상섶은 다시 ‘큰마을’, ‘윗마을’, ‘공주골’, ‘뒷말’, ‘중간마을’ 등으로 세분된다.
주 작물은 벼농사이고, 그 밖에 한우와 배농사를 짓고 있다. 한우의 경우 68가구에서 700여두를 기르고 있고, 배는 10여 가구에서 5ha를 경작하고 있다. 이 마을은 2008년 1월 현재 총 200여 가구에서 230세대가 생활하고 있으며, 주민 수는 총 514명으로 남자가 246명, 여자가 268명이다.
신계리(薪溪里)는 또 경주지역에서 장수(長壽) 마을로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7번국도에서 6.25당시 야전비행장이었던 괘릉리의 ‘방갓디(방갓등)’을 지나 마을입구에 이르면 100년은 족히 넘을 소나무 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범상(凡常)치 않은 분위기를 풍긴다.
토함산(吐含山) 준령 ‘동산령(東山嶺)’에서 발원하는 맑은 물과 청정한 공기 탓에 80세를 넘긴 노인들 이 45명이나 되는 장수마을이다. 대부분 논·밭농사로 중류생활(中流生活)을 하고 있는 이 마을에는 550년의 역사를 간직한 인천이씨가 50여 가구쯤 산다. 이들은 ‘뒷말’에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마을에 인천이씨가 거주하게 된 역사적인 내력을 아는 이는 드물다. 조선 초기 함길도(咸吉道) 도절제사로 재직 중 수양대군의 단종폐위에 반기를 든 뒤 여진족(女眞族)의 추대로 대금제국(大金帝國)을 건국하는 등 풍운의 시대를 살다 숨진 ‘충강공’ 이징옥 장군이 이들의 선조인 탓에 한동안 신분을 숨긴 채 숨어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징옥 장군은 1399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17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 태종(太宗) 16년인 1416년에 부거책장 수비대장을 역임하고, 경상도 도절제사(都節制使)와 평안도(平安道) 도절제사, 판중추원사 등을 거쳐 문종 2년엔 사군육진(四郡六鎭)을 개척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이후 장군은 또 그때의 용맹으로 여진족의 추앙을 받아 여진족이 건국하고자 했던 대금제국(大金帝國)의 왕으로 추대된바 있으나, 이를 역모로 단정한 조정에서는 토벌군을 보내 살륙하기에 이르렀다.
역사책에 이징옥의 난으로 기록된 사건이 그 발단이다. 당시 이징옥 장군과 장남과 차남 등 일가족은 모두 참변을 당했으나, 당시 8세의 어린나이로 고향인 경남 양산 큰집에 머물던 이 장군의 삼남인 연원(淵源)은 유모에 의해 빼돌려져 목숨을 구했다.
‘연원(淵源)’과 유모는 양산에서 외동읍 남단의 ‘치술령’을 넘어 산 설고 물 선 이곳 토함산 아래 계곡 옆에 이르러 지금의 형산강 지류인 시래천(時來川) 상류에 ‘섶’을 치고 우거하면서 신분을 숨기기 위해 본관을 초산(草山)으로, 이름을 태엽(台燁)으로 바꿔 자손을 퍼뜨렸다.
그 뒤 자손이 번창(繁昌)하고, 340여년의 세월이 흐른 정조(正祖) 15년인 1791년에 장군의 충절(忠節)이 인정받게 돼 ‘충강’이란 시호(諡號)를 추증 받았고, 비로소 후손들은 세상에 떳떳하게 신분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순조(純祖) 12년인 1812년에 본관을 인천(仁川)으로 환관시킨 이 장군의 후손들은 이 같은 난관을 겪으면서 더욱 단단한 가풍을 이어 나갔다고 자랑한다.
이상주 전 교육부총리를 비롯해 이동근 경주향교 전교 등이 신계리(薪溪里) 출신 ‘충강공’의 직계후손들이다. 이 외에도 신계리 출신으로는 이진구(61·경주시의원), 이정구(61·전 경주시 도시건설국장), 김채한(60·매일신문 편집국장), 김병도(58·보덕동장), 이동욱(58·대덕연구단지 연구원), 김병욱(52·경북개발공사 전무이사), 이석윤(44·예비역 육군중령) 등이 있다. 필자가 영지초등학교(影池初等學校)에서 6학년 때 급장(級長 ; 반장)을 하던 ‘이진복’군도 이곳 ‘뒷말’에 살았다.
고향을 지키고 있는 지금의 50가구의 후손들은 지난 1960년 이후 선조들이 마련해 놓은 인근 괘릉리(掛陵里)의 문중산 23ha 중 13ha를 팔아 장만한 4억5천만원으로 그동안 제향소(祭享所)로 사용하던 ‘경모재’를 상신사(上薪祠)로 고친 뒤 ‘충강공’의 묘를 대신하는 비석을 겸한 제단비(祭壇碑)를 세우고, 해마다 음력 3월에는 향중 제사를 지내고 있다.
경모재(상신사)
‘충강공’의 후손들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전까지는 ‘하섶’에서 거주하다 임란 당시 ‘뒷말’로 옮겨 살고 있다. 토함산 주령(主嶺)의 남서편인 ‘뒷말’에 입주할 당시 심은 느티나무가 이 마을의 역사를 입증하듯 지금도 우람하게 버티고 있다. 이 느티나무는 1982년부터 경주시(慶州市) 보호수로 지정됐으며, 주민들은 이곳에서 정월 초에 동제(洞祭)를 지낸다.
‘뒷말’ 입구에 있는 수령(樹齡) 350년의 느티나무가 ‘당나무’로 숭상되고 있고, 이 나무 밑에서 당제가 올려 진다. 이 ‘당수나무’에는 다음의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일본인들이 안압지 임해전을 짓는데 대들보를 하기위해 이 당수나무를 베어가려 한바 있다.
신계리 ‘뒷말’ 느티나무 당목(堂木)
그러자 동민들이 가시로 나무주위를 둘러치는 등 필사적(必死的)으로 나무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였다. 결국 일본인(日本人)들은 이 나무 대신 옆에 있는 다른 나무를 베어가서 임해전 정자(亭子)의 ‘보’로 사용했다. 이 정자는 1970년대에 ‘호림정’으로 옮겨졌는데, 지금의 ‘호림정’의 대들보가 그 나무라는 이야기가 된다.
신계리는 또 임진왜란의 의병장 김득복(金得福)과 그의 동생 득상(得祥)의 출신마을로 김득복(金得福) 장군을 기리기 위해 그 후손들이 동엄공신도비(東嚴公神道碑)와 동엄정사(東嚴精舍) 지어 그를 추모하고 있다. 장군 형제의 공적은 다른 파일에서 소개하기로 하고, 신계리의 자연부락과 서당(書堂), 정자(亭子), 재실(齋室) 등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 상신(上薪)
‘상섶’이라고도 하며, '서배'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상리(上里)’라고도 한다.
○ 하신(下薪)
'서배'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하섶’이라고도 한다. 4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큰마을
‘상섶’ 입구 앞 솔밭 옆에 있는 큰 마을로 ‘앞마을’이라고도 한다.
○ 중간말
'앞마을'의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다. ‘경암정’과 ‘삼백정’이 이 마을에 있다.
○ 웃말
'상신' 위쪽에 있는 마을로 ‘윗마을’이라고도 한다. 당나무와 '상신사', '충강공신도비'가 이 마을에 있다. 2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공정골
'상신'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8자(八字)로 생긴 두 능선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하여, ‘공정곡(公政谷)’, ‘공주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뒷말' 위에 있으며, 3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뒷말
'상신' 북쪽에 있는 마을로 뒤에 있는 마을이라 ‘뒷마을’, ‘후리(後里)’, ‘뒷말’이라 부른다. 1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충강공신도비(忠剛公神道碑)
충강공 이징옥(李澄玉)의 신도비로 사당이 있던 ‘상신’ 입구에 40여 년 전에 세웠다. 앞서 소개한 대로 함길도 절제사로 있던 이징옥이 단종폐위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다 실패하여 피살되었으며, 가족들도 함께 처형당했다. 그러나 막내아들 이윤연(李沇淵)만 살아남아 유모의 등에 업혀 양산에 있던 큰집에 갔으나 역적이라며 쫓아내어 이곳으로 와서 정착했다. 이 신도비는 토함산을 뚫어 장항으로 연결하는 터널의 진입로 부근에 있어 곧 옮겨야할 운명에 처해 있다.
○ 동엄공 신도비(神道碑)
김해인 동엄 김득복(金得福)을 기리기 위해 그 후손들이 세웠다. 공은 임진왜란 때 3남영장(三南領將)을 지냈고, 가의(嘉義)의 품계에 올랐다. 선무원종1등공신으로 봉해졌다. 본래 이 자리에는 동엄공의 사당과 살던 집이 있던 곳이었는데 1977년에 헐고 그 자리에 신도비를 세웠다.
○ 경암정(敬菴亭)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경암 '김응춘'을 추모하여 1946년 그 후손들이 세운 정자이다. 경암 '김응춘'은 선조때 훈련원 정에 제수된 후 선무원종일등훈을 받았다. '김응춘'은 명종 2년 외동읍 죽동리 '새원'부락 장군봉아래서 태어났다.
경암정
○ 삼백정(三栢亭)
경주인 김영택(金永澤)이 1928년에 건립했다는 정자로, '경암정' 뒤에 있다. 정원에 잣나무 세 그루를 심고 그 푸른 기개를 흠모하며 은거했다고 전하는 이 정자는 높은 언덕배기에 지어 전망이 좋고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정자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2칸은 마루를 양쪽에는 방을 배치했다.
삼백정
○ 동엄 정사(精舍)
임진왜란 때 창의한 공신 김득복(金得福)을 추모해 세운 정자이다. 이 '정사'는 본래 1600년경에 몽양재라는 서당으로 지었던 게 허물어지고, 40여 년 전에 다시 지었는데 또 허물어진 것을 지금의 자리에 옮겨서 1958년에 다시 지었다. 낙성식 때 호를 따서 동엄정사로 고쳤다.
동엄정사
○ 상신사
충강공(忠剛公) 이징옥(李澄玉)을 추모하여 인천이씨(仁川李氏) 문중(門中)에서 1957년에 지은 재실로 ‘웃마을’에 있다. 본래 ‘경모재(景慕齋)’였는데 10년 전에 3문과 서재, 묘우, 제단을 새로 지으면서 ‘상신사’로 고쳤다.
○ 경모재 단소(景慕齋壇所)
충강공(忠剛公) 이징옥(李澄玉)을 제향하는 단소(壇所)로 '상신사' 경내에 있다. 1979년 단(壇)을 설치하고 단비를 세웠다고 한다.
○ 청봉서당(晴峯書堂)
김해인 고헌(高軒) 김덕련(金悳鍊)이 1921년에 세운 서당으로 많은 후진을 배출했다고 전한다. 고헌문집 3책과 별책 1권이 전한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서당은 낡고 허물어져 가고 있다.
○ 가동산(歌童山)
'공주골' 위에 있는 토함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나지막한 산으로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듯이 나지막한 산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 학산
모양이 학처럼 생긴 산으로 '가동산' 남쪽에 있다.
○ 독좌산
'학산' 남쪽에 홀로 뚝 떨어져 있는 산인데, 마치 아이가 홀로 앉아 있는 형국이다. ‘도끼산’이라고도 한다.
○ 한무덤산
무덤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산으로 ‘앞 솔밭’ 동쪽에 있다. 한씨의 묘가 있었다고도 하고, 혹은 '손(孫) 병사의 무덤'이라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하므든산’이라고도 한다. 기단이 2중으로 있는 규모 있는 묘이다. 감산사 절이 손 병사 때문에 망했다고도 전한다.
○ 서뱃재
'서배'에서 양북면 장항리의 '탑정'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속재
'뒷말' 동쪽에서 양북면 장항리의 '탑정'으로 넘어가는 고개였는데 지금은 길이 없다. '동산재'와 '서배재' 사이에 있다.
○ 앞 솔밭
큰 마을 앞에 있는 소나무 숲으로 ‘중이골’이라고도 한다.
○ 개불등
'상신'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지금은 개발하여 과수원을 만들었다.
○ 너구릿등
지형이 너구리처럼 생긴 등성이로 '뒷말' 끝에 있다.
○ 동말리
'윗마을'의 뒷등에 있는 등성이로 마을 동쪽머리이다. '큰마을' 뒤쪽에 있는 등성이다.
○ 정(松亭)등
'공주골' 앞쪽에서 '성짓골'에 걸쳐 있는 등성이다.
○ 성짓골
'독좌산'과 '학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 뒷골
‘하신’ 뒤에 있는 들인데, 골짜기에 있는 들이다.
○ 배암골
배암(뱀)이 많이 서식했던 골짜기로 '웃골' 남쪽에 있다.
○ 복캣골
성짓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그 안에 폭포가 있어서 ‘폭캐’라고 하던 게 변해서 ‘복캣골’이 되었다고 한다. 게가 엎드린 형상이라 ‘복해곡’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 웃골
'웃말' 위 '서배재'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초막골
초막이 있었다고 하는 골짜기로 '서배재' 남쪽에 있다. 괘릉리와의 경계지점에 있다.
○ 한이골(하이골)
'서배' 동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로 ‘대리동(大里洞)’이라고도 하며, 골짜기가 깊어 ‘아흔아홉골’이라고 부른다. ‘하이골’이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괘릉리지역으로 편입되어 있다.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을 하기 전까지는 '하이골' 입구의 괘릉리지역 감산사 일원이 신계리지역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하이골'은 신계리지역이었다.
○ 탑거리
탑이 있었던 논으로 큰 마을 동남쪽에 있다. 주민들은 이곳이 본래 감산사 터이고 지금의 감산사는 암자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로 이곳의 탑이 대단히 컸다고 한다. 이 탑의 기단면석(基壇面石)으로 보이는 일부가 현재 '경암정'과 '동엄정'의 주춧돌로 사용되고 있어 탑이 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곳이 감산사와 개울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어 같은 사역이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주민들의 주장처럼 실제로 이곳이 감산사 터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부터는 감산사가 괘릉리 지역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 봇거리
'웃말' 동쪽에 있는 곳으로 근처에 보가 있어 ‘봇거리’라고 한다.
○ 구터
옛 집터가 있었던 들로 '하신' 동쪽에 있다. ‘구기(舊基)’라고도 한다. 인천이씨들이 처음 자리 잡고 살던 곳이라고 전한다.
○ 너구릿등
'들 너구릿등' 밑에 있는 들이다.
○ 대서들
물이 없고 가뭄을 잘 타는 한발지역이라 ‘대서들’이라고 한다. '상신' 북쪽에 있다.
○ 바들기
'큰마을' 앞들이다. 솔보의 물을 대어 농사를 짓는 들이라 ‘송봇들’이라고도 한다.
○ 사들이들
'하보'의 물을 받아 농사를 짓는 들로 ‘사등이들’이라고도 한다. 토함산에서 흘러내리는 내를 ‘사등이천’인데 '사등이들'이 변해서 ‘사들이들’이라고 한다고 한다.
○ 소뒤
'뒷등' 뒤뜰에 있는 들로 솔밭 뒤가 됨으로 ‘소뒤’라고 했다고 한다.
○ 솔보
'바들기'에 물을 대는 보로 ‘송보(松洑)’라고도 한다.
○ 양달봇들
'양달보'의 물을 받아 농사를 짓는 들로 '하신' 동북쪽에 있다.
○ 외솔배기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던 논으로 '상신' 동남쪽에 있다. 지금은 소나무가 없다.
○ 염싯보
'양달보' 동쪽에 있는 보로 ‘염수보’라고도 한다. '공주골' 뒤에 있다.
○ 양달보
양지쪽에 있는 보로, '공주골' 앞에 있다. '양달봇들'에 있다.
○ 집앞보
'웃말' 앞에 있는 보다.
○ 하보(下洑)
'하신' 남쪽에 있는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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