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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역사/유적/국내 관련

현충일 제정 의의 / 배경 / 과정 / 국립현충원 / 국립대전현충원 / 현충일 노래

1. 현충일 제정 의의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신 순국선열과 국토방위의 성전에 참여하여 호국의 신으로 산화한 전몰장병의 영령에 대하여 생전의 위훈을 추모하고 명복을 기원하는 동시에 그 유가족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하고 조국통일 성업에 대한 온 국민의 결의를 굳게 다짐하는 날로 국립 서울현충원을 창설하고 안장을 실시했던 첫 해인 1956년 4월에 제정해서 그 해 6월 6일부터 실시함.

※ 2008년은 제53회 현충일임


2. 6월 6일을 현충일로 택한 배경

   ㅇ 예로부터 내려오는 역사적 풍습
       24절기 중 손이 없다는 청명일과 한식일에는 사초와 성묘를 하고, 망종(芒種)에는 제사를  지냈음

       ※ ‘손’이란? :
            날 수를 따라 동서남북 네 방위를 돌아다니며 사람의 활동을 방해한다는 귀신을 말하며
            이것이 없는 날을 이삿날 등으로 선정함

       ※ ‘청명’과 ‘한식’이란? :
           4월 5일을 전후한 시기로 한식은 청명의 다음날임. 청명일에는 조상의 묘소를 찾아
           무덤과 주변의 잔디를 살피고 훼손된 것을 손질하며 한식일에는 묘소를 찾아 성묘를 함


    ㅇ 1956년 제정당시 6.25를 상기하고 역사적인 풍습을 고려하여 그해의 망종일인 6월 6일을 현충일로 택함

        ※ 망종(芒種)이란? :
            망종이란 까락 곡식(까끄라기가 있는 곡식 : 보리, 벼 등)의 종자를 뿌려야 할 적당한 시기인
            24절기의 하나로 태양 황경(黃經)이 75°에 달한 날, 즉 6월 5일, 6일 또는 7일이 된다.


     ㅇ 옛적에는 이 시기가 보리 베기와 모내기에 적당한 시기이다.
         따라서 조상들은 이 시기에 보리를 수확케 해 준 것에 대한 감사와 모내기를 한 벼들이
         풍년이 들게 해주기를 기원 하는 감사와 기원의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가졌다.


3. 현충일 제정 과정

현충일(顯忠日)은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고 순국선열 및 전몰장병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위훈을 추모하는 행사를 하는 기념일로 매년 6월 6일이며,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데에는 상당한 전란을 거치게 되어 있고, 모든 국가는 그 전란에서 희생된 자를 추모하는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5월의 마지막 월요일'메모리얼 데이'라고하는 우리의 현충일과 그 성격이 비슷한 미국판 현충일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1948년 8월 정부수립 후 2년도 채 못 되어 6·25동란을 맞았고 이에 40만명 이상의 국군이 사망하였습니다. 1953년 휴전이 성립된 뒤 3년이 지나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자 정부는 1956년 4월 대통령령 제1145호로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건〉을 개정하여 매년 6월 6일을 현충기념일로 지정하여 공휴일로 하고 기념행사를 가지도록 하였는데 현충기념일은 통상적으로 현충일로 불리다가 1975년 12월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어 공식적으로 현충일로 개칭되었습니다. 국가보훈처가 주관이 되어 기념행사를 행하는데 서울에서는 국립묘지에서 행해집니다. 추모대상은 6·25동란에 전사한 국군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모든 선열의 넋을 기리고 있습니다.

 

4. 국립현충원

가. 국립서울현충원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군이 창설되어 국토방위의 임무를 수행하여 오던 중 북한 인민군의 지적 도발과 여수/순천사건 및 각 지구의 공비토벌작전으로 전사한 장병들을 서울 장충사에 안치하였다.

그러나 전사자의 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육군에서 묘지 설치문제가 논의되어 1949년말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서울근교에 묘지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6.25전쟁으로 묘지 설치문제는 중단되었고 각 지구 전선에서 전사한 전몰장병의 영현은 부산의 금정사와 범어사에 순국 전몰 장병 영현 안치소를 설치,봉안하여 육군병참단 묘지등록중대에서 관리하였다.

계속되는 격전으로 전사자의 수가 점차 증가하여 육군에서는 다시 육군묘지 설치 문제가 논의되고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주관하에 묘지후보지 답사반을 구성하여 제1차로 대구지방, 제2차로 경주지구 일대를 답사한 결과 경주시 형산강 지류인 천북대안 일대를 육군묘지 후보지로 선정하고 추진하던 중, 군 고위층에서 현지를 답사하여 검토한 결과 지역적으로 편재되어있고, 침수의 우려가 많을 것을 고려하여 타지역으로 후보지를 재선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내려져 일단 중지하게 되었다.

1952. 5. 6. 국방부 국장급 회의에서 육군묘지 설치문제에 대하여 논의한 결과, 육군묘지를 설치하게 되면 타군에서도 각기 군묘지를 만들어 관리상 많은 예산과 인원이 소요되고, 영현 관리의 통일성을 기할 수 없는 등 여러가지 폐단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육군묘지 설치문제는 일단 보류하도록 지시하고, 3군종합묘지 설치를 추진하되, 묘지의 명칭은 국군묘지로 칭할것을 결의하였다.

1952. 5.26. 국방부 주관으로 국군묘지 후보지 선정을 위하여 3군 합동답사반을 편성하고, 동년 11. 3. 군묘지설치위원회를 구성한 후 ‘52.11월부터 ’53. 9월까지 11개월 동안 7차에 걸쳐 10개 지역을 답사하였다. 답사 결과 동작동 현 위치를 국군묘지 후보지로 선정하여 ’53. 9.29.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국군묘지 부지로 확정하고 ’ 54. 3. 1. 정지공사를 착공한 이래 3년에 걸쳐 묘역 238.017㎡ 을 조성하고, 그 후 연차적으로 68년 말까지 광장 99.174㎡, 임야 912.400㎡ 및 공원행정지역 178.513㎡을 조성하였다.

1955. 7. 15. 군묘지 업무를 관장할 국군묘지 관리소가 발족되고, 이어서 1956. 4. 13. 대통령령으로 군묘지령이 제정되어 군묘지 운영 및 관리를 위한 제도적 기틀이 마련되어 전사 또는 순직한 군인, 군무원이 안장되고 덧붙여 순국선열 및 국가유공자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안장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6.25 전쟁으로 발생한 많은 전사장병 처리를 위해 지금까지 군인 위주로 이루어져 왔던 군묘지 안장업무가 1965. 3. 30. 국립묘지령으로 재정립되어 애국지사, 경찰관 및 향토예비군까지 대상이 확대됨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귀한 삶을 희생하고, 아울러 국가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분들을 국민의 이름으로 모시게 되어 그 충의와 위훈을 후손들에게 영구히 보존,계승시킬 수 있는 겨레의 성역으로서 국립묘지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2005.7.29 국회에서 의원입법으로 제정 공포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 제7649호, 시행 2006.1.30"에 의거 동작동 국립묘지의 명칭이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변경되고, 소방공무원과 의사상자도 안장대상자에 포함되었다.


나. 국립대전현충원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장렬히 산화하신 호국영령 및 순국선열을 모시고 그분들의 생전의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1955. 7. 15. 서울 동작동에 설립한 국립묘지에는 일제침략을 전후하여 활약한 애국지사와 순국선열 그리고 6.25 전쟁과 월남전 등을 거치는 동안 전사 또는 순직한 수많은 호국영현을 안장하여 왔으나,

안장능력이 한계에 이름에 따라서 1975년 2월부터 1975년 10월까지 9개월간 국립묘지 후보지를 국방부 실무진 6명과 민간인 2명으로 구성된 답사반의 답사 결과 1976. 4. 14. 충남 대덕군 유성읍 갑동리(현재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으로 행정구역 변경)의 현 위치에 대전국립묘지를 설치하게 되었다.

또한, 2005.7.29 국회에서 의원입법으로 제정 공포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 제7649호, 시행 2006.1.30"에 의거 국립 대전현충원이 국가보훈처로 소속 이관되었다.


5. 현충일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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