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떴을 때 지난밤 술자리에서의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집에 언제 어떻게 돌아왔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는다면?
하루가 멀다 하고 술자리가 이어지는 연말, 특히 직장인들은 필름이 끊기도록 마셔서 이튿날 동료들 얼굴보기 난감해지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 할 수 있는 실수로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만 이것이 습관적으로 반복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범죄를 저지르거나 큰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장기적으로는 뇌가 손상돼 기억력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 블랙아웃이란?
술 마신 후 '필름이 끊긴다'고 흔히 표현되는 단기기억상실은 의학용어로 '블랙아웃'이라 한다. 블랙아웃은 의식소실과는 달리 대개 목적적이고 자발적인, 그리고 비교적 어려운 행위들까지도 수행할 수 있다. 단지 기억을 하지 못할 뿐이다.
이들은 음주 직전 습득한 정보나 그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장기기억에는 큰 문제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음주 중 입력된 내용들은 시간이 지난 후에 기억해내는 데 어려움을 보인다.
혈중 알코올 농도 0.15% 정도부터 기억력 장애가 나타난다. 대개 이 정도는 소주 5~6잔 가량을 마신 후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내용을 종종 기억 못하는 수준이다.
블랙아웃에는 음주 이후의 일정 기간을 전혀 기억 못하는 총괄적 블랙아웃과 부분적으로 기억을 하는 부분적 블랙아웃이 있고 후자가 훨씬 흔하다.
블랙아웃은 음주량과 관련이 있으나 특히 급격한 혈중 알코올 농도 상승에 영향이 있다. 갑작스러운 알코올 증가가 뇌로 하여금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아 발생하는 것이다.
또한 공복시의 음주도 혈중 알코올 농도를 급히 올려 영향을 준다. 블랙아웃 대부분은 음주 후 수 시간, 즉 혈중 알코올 농도가 올라가고 있는 시기에 발생한다.
◇ 뇌에 저장되지 않고 사라지는 기억
알코올 의존으로 인한 기억 손상은 임상 양상이 대뇌의 해마 손상 환자들에서와 비슷하게 나타나 해마의 이상으로 추측되고 있다.
해마는 기억이 영구 기억으로 새겨지기 전에 임시로 머무는 임시기억저장소다. 해마에 임시로 입력되어 있던 기억은 뇌세포들 사이의 전기신호를 타고 뇌 외피층인 신피질에 저장된다.
이때 알코올이나 아세트알데히드의 독소가 뇌세포를 직접 파괴하지는 않고, 세포와 세포 사이의 신호전달 메커니즘을 교란시켜 기억의 저장을 방해한다.
결국 데이터 입력은 시켰으되 저장하지 않고 컴퓨터를 끄는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인 것이다. 아예 뇌에 정보가 입력되지 않은 것이므로 능숙한 최면술사가 최면을 걸어도 당시 상황을 기억할 수 없다.
◇ 장기간 반복되면 '알코올성 치매' 이어져
2002년 미국 듀크 대학의 White 교수가 772명의 대학생을 상대로 블랙아웃 상태에서 경험한 것들을 조사한 결과(중복체크 가능), 타인을 공격하는 경우가 33%로 가장 많았고, 돈을 함부로 쓰거나(27.3%), 성적인 활동(24.8%), 다투거나 싸움(16.3%), 기물 파손(16.1%) 등이 그 뒤를 잇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칫 타인에게까지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음주운전도 2.5%로 나타났다. 이러한 위험한 행동들은 알코올이 뇌에 영향을 끼치면서 감정조절에도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블랙아웃이 해마의 신경세포 재생을 억제한다는 점이다. 블랙아웃 현상이 장기간에 걸쳐 반복될 경우 뇌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술을 마시면 알코올이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지는데 특히 뇌는 다른 장기들보다 피의 공급량이 많기 때문에 뇌세포가 손상을 입는다.
한림대의료원 한강성심병원 정신과 최인근 교수는 "초기엔 뇌의 기능에만 문제가 생길 뿐 구조적 변화 없이 다시 원상회복이 되지만 필름 끊기는 일이 계속 반복되면 탄성을 잃은 스프링처럼 뇌에도 영구적인 손상이 와서 종래에는 알코올성 치매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알코올성 치매에 걸리면 뇌가 쪼그라들면서 가운데 텅 빈 공간인 뇌실이 넓어지게 된다. 3번 이상의 블랙아웃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경우 53~58% 정도 유전적 경향이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 폭음 습관부터 고쳐야 '안심'
필름이 한번 끊기기 시작하면 그 다음엔 자동적으로 끊긴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과 다르다.
필름이 계속 끊기는 이유는 폭음하는 음주 행태가 고쳐지지 않고 계속되기 때문이다. 과거에 파편적인 블랙아웃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비교적 낮은 알코올 혈중 농도에서도 기억력에 장애를 보일 수는 있다.
블랙아웃은 술 마시는 양과 속도에 비례해 발생한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술 마시는 횟수와 양을 줄여야 한다. 알코올이 뇌에 영향을 미치기 전에 간에서 충분히 분해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마셔야 하는 것이다.
간에서 알코올을 분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시간당 7~10g으로, 체중 60kg인 사람이 맥주 1병(500㎖, 4%)을 마시는 경우 대사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3시간 정도다.
소주 1병(360㎖, 25%)을 마신 경우 모두 산화되는 데 약 13시간이 소비된다. 때문에 술은 천천히 마시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한번 술을 마신 후 다음 술자리를 갖기까지 3~4일 간격을 두는 것이 좋다. 음주 후 72시간이 지나야 간이 정상적으로 회복되기 때문이다.
최인근 교수는 또 "채소, 과일류, 단백질이 풍부한 식품 등 적정한 안주와 함께 마시며 반드시 음주 전에 식사부터 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며 "독한 술은 되도록 냉수와 함께 희석해서 마시고, 다른 종류의 술끼리 섞어 마시지 않도록 한다"고 조언했다.
최 교수는 특히 "담배를 피우면서 마시지 않도록 하며, 극도로 불안할 때나 화를 풀기 위해서 마시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출처 : 뉴시스, 이상백기자 lsb3002@md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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