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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역사/유적/유적,유물,문화재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 '탈'

 

탈이란?

(가면)이란 한자로거짓 '가(假)' 낯 '면(面)'이니 가짜 얼굴이란 뜻인데

우리말로는 탈, 탈바가지, 초라니라 불려왔으나 현재는 일반적으로 '탈'이라 통칭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가면으로 최초의 것으로 알려진 것은 6세기경 신라시대의

방상씨로서 1946년 경주 노서리 호우총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그 외에 덕물산가면, 국보 121호로 지정된 하회탈, 병산탈 등 옛 탈이 현존하고 있다.

옛부터 사용된 탈 중에서 고구려의 무악면은 서역의 영향을 받았고, 백제의 기악면, 신라의 월전, 속독, 산예 등도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방상씨는 중국에서 전해 받았다고 한다.





한국탈의 특징

한국탈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해학'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나라의 탈들이 대개 무서운 표정을 한 신이나 토템을 표현해 공포감과 경외감을 주는 반면, 우리나라 탈의 경우는 전반적으로 웃거나 놀란 표정을 짓고 있어 인간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우리 탈은 한국적인 표정과 용모가 잘 나타나있을 뿐만 아니라 그 역(役)에 따른 인물의 개성도 잘 표현되어 있으며, 특히 하회탈의 선비, 양반, 각시, 중, 백정 등에 나타난 조각수법은 우리나라 나무 탈 중 걸작에 속한다. 탈은 그 자체가 훌륭한 조형미술품일 뿐 아니라 여러가지 상징성을 지닌 역사적 유물이다. 옛날 사람들은 탈을 씀으로써 진짜 그 힘과 영(靈)이 자신에게 깃든다고 믿어, 재앙과 병을 가져오는 악신이나 역신(疫神)을 쫓으려 할 때는 그보다 더 무섭고 힘이 있는 가면을 쓰고 쫓아 버려야 한다고 여겼다.
한국탈은 몇몇 신성시되는 탈(창귀씨탈, 놋도리탈, 장군탈, 소미씨)을 제외하고는 놀이에 사용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전국에 골고루 퍼져 있는 탈놀이들은 예능적인 면이 두드러지지만 액을 막고 복을 기원하는 민간 신앙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한국탈은 놀이를 하는데 편하게 제작되었다.

 

한국탈의 형상과 성격

우리 탈은 과장되어, 코는 삐딱하고 눈꼬리는 사납게 찢어져 있는가 하면, 입이 비뚤어져 있는 경우가 흔하다. 언청이탈, 문둥이탈, 옴탈과 같이 얼굴이 특이하거나, 혹이 나 있고, 이가 드러나 있으며, 이마가 넓고 주름이 많아서 각 부위의 비례가 맞지 않는 탈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면서도 사자탈이나 원숭이탈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듯이 모든 탈은 인간적이다.
탈은 거의 타원형이지만, 바가지탈은 원형에 가깝고 나무탈과 종이탈에는 장방형, 역사다리꼴, 역삼각형도 있으며, 가죽탈처럼 모가 난 경우도 있다. 우리 조각품이 평면적인 것과는 달리 가죽탈을 제외하면 입체감이 두드러진다. 눈은 대체로 크고 동그랗거나 치켜 뜨고 있으며, 코의 경우 젊은 남성탈은 지나치게 크게 과장 되어 있고, 여성탈은 콧대가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거나 굽어 있다.

 

대부분의 탈은 생김새가 극중 성격을 드러낸다. 양반의 바보스러움과 병신스러움을 우스꽝스럽게 나타내기 위하여 언청이와 문둥이 등으로 형상화하고, 노승의 허위를 풍자하기 위하여 검은 얼굴에 파리똥이 덕지덕지 앉은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탈의 형상에 이미 극중인물의 성격이 희화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들놀음의 말뚝이탈은 남성의 성기모양의 코가 이마에서 입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이는 건강한 성생활을 즐기는 민중의식의 반영이자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주술적 표현이기도 하다.


 

한국 탈의 유래와 역사

가면을 사용한 것은 원시시대부터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처음에는 수렵생활을 하던 원시인들이 수렵 대상물인 동물에게 접근하기위한 위장면(僞裝面)으로, 뒤에는 살상한 동물의 영혼을 위로 하며 또한 그 주술력을 몸에 지니기 위한 주술적 목적에서 비롯하여 점차 종교적 의식과 민족 신앙의 의식용으로 변모, 발전되었다.
우리 탈의 시작은 부산 동삼동에서 출토된 패면(貝面)과 강원도 양구에서 출토된 토면(土面) 등으로 보아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갈 수 있다. 탈의 형태를 갖춘 최초의 유물은 신라시대의 '목심칠면'을 들 수 있다. 1946년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이 탈은 눈알은 유리로 되어 있고 두 눈에는황금 환(環)이 그려져 있다. 6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탈은 죽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방상씨' 탈로 고대 신라시대부터 장례에 탈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덕물산(德物山) 가면과 국보 제121호로 지정된 13개의 하회탈 및 병산탈 등이 전해진다. [삼국사기]와 최치원의 [향악잡영 鄕樂雜詠]에도 탈놀이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니까 우리 나라의 탈의 기원은 적어도 삼국 시대 훨씬 이전이 된다. 궁중제의나 나례 등에 주로 연희되었던 탈놀이는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 서민의식의 향상과 더불어 신앙적인 측면보다는 양반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 더욱 강조되면서 지금의 놀이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탈의 분류

흔히 탈을 분류하는데는 쓰임새, 기능 등에 따라서 벽사 가면, 의술 가면 등으로 세분 할 수도 있으나 크게 [신앙탈]과 [예능탈]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앙탈이란 그 탈에 제사를 지내거나 어떤 소망을 기원하기도 하고 지킴이로써 받들기도 하는 것인데 대개의 경우 일정한 장소에 모셔 두는 경우가 많다. 같은 '신앙탈'이라도 이와는 달리 얼굴에 쓰거나 양손으로 드는 등 움직이면서 귀신을 쫓는 의식에서 쓰는 구나(驅儺)면이 있다.

예능탈이란 주로춤추고 굿하고 놀이할 때 얼굴에 쓰는 것으로 그 종류도 다양하다. 놀이탈은 양반광대놀이, 비비새놀이, 소놀이굿, 거북놀이 등에서 보이듯이 다분히 즉흥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이처럼 나누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이 성격, 기능을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다.


신성가면 - 광대씨 가면, 창귀씨 가면, 소미씨 가면, 놋도리 가면, 장군  

구나가면 - 기가면, 방상씨 가면


무용가면 - 처용가면

연극가면 - 산대 가면, 해서 가면, 야유, 오광대 가면, 성황신제 가면

사자가면

 

탈놀이 분포도

탈을 사용한 의례와 놀이는 여러 형태로 남아 있었다.
현재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탈놀이는
해서탈춤계, 산대놀이계, 오광대계, 야류계, 서낭신제탈춤

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해서탈춤계열 : 황해도의 봉산, 강령, 은율탈춤,
산대놀이계 :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
오광대계열 : 통영.고성.가산 오광대놀이
야류계 : 수영.동래 야류
 서낭신제 탈놀이로는 하회별신굿탈놀이와 강릉관노가면극이 있다.

그 외 남사당놀이 가운데 덧뵈기가 있다.
예천 청단놀음, 지방문화재로 등록된 영해별신굿의 탈굿과 영광농악의 잡색놀음이 있다.
그 외에도 많은 탈놀이들이 현존하였었다.

국보 제121호. 하회탈

 

 

"하회탈"은 하회마을에서 전해져 온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회탈은 우리나라의 많은 탈 가운데 유일하게 국보(국보 제121호, 병산탈 2개포함)로 지정된 귀중한 우리의 문화적 유산이며 가면미술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회탈은 양반, 선비, 중, 백정, 초랭이, 할미, 이매, 부네, 각시, 총각, 떡다리, 별채탈 등 12개와 동물형상의 주지2개(암주지 숫주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총각", "떡다리", "별채" 탈은 분실된 채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하회탈은 사실적 조형과 해학적 조형을 합하여 각 신분적 특성을 표현하였으며, 그 특성에 합당한 관상까지도 지니고 있다. 또한 얼굴은 좌우를 비대칭적으로 만들어 고정된 표정을 피하고, 모두가 각 성격의 특성에 알맞은 표정을 짖도록 만들어졌다. 그래서 탈의 기능도 매우 뛰어나다.


하회탈은 모두가 오리나무로 만들어 졌으며 제작시기는 대략 고려 중엽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회탈은 하회마을에 보관되어 오다가 1964년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는 국립 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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