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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상식

노벨평화상

노벨 평화상에 대하여


▲ 성격과 의의

올해로 100년째를 맞은 노벨 평화상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노벨 재단에서 매년 평화 정착과 인권 향상 등에 공헌한 사람 또는 단체를 대상으로 시상한다.


노벨 평화상은 다른 노벨상이 스웨덴 왕립 과학아카데미, 캐롤라인 의학연구소, 한림원 등에서 선정하는 것과 달리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선정과 시상 권한을 갖고 있다.
이는 노벨상을 제정한 노벨의 유언에 따른 것으로 노벨 평화상은 노벨상 내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노벨 평화상은 1,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20여 차례 적당한 수상자를 찾지 못해 시상을 거르기도 했지만, 공동수상인 경우가 많아 김대중 대통령은 81번째 수상, 107번째 수상자(단체 포함)가 됐다.
노벨상은 유일하게 단체 수상자를 배출하는 분야이다.
노벨 평화상은 40년대까지 정치인, 국제기구 창립자들이 주로 선정됐으나, 50년대부터는 인권 운동가, 단체에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 평화상을 노르웨이가 선정하는 이유


노벨상 6개 부문 중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스웨덴의 왕립 과학아카데미나 한림원이 아니라 노르웨이 노벨위원회(The Norwegian Noble Committee)가 선정하는 이유는 뭘까.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노르웨이에서 결정하게 된 것은 노벨의 유언에 따른 것인데 노벨이 평화상만을 유독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결정하도록 한 이유에 대해서 정설은 아니지만 3가지 설이 있다.

첫째, 노벨이 유언장을 작성한 1895년 당시 노르웨이는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스웨덴과 합병된 상태였는데 노벨이 노벨상 선정자를 찾는 과정에서 통합국가의 일부분인 노르웨이에 평화상 선정을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둘째, 당시 노르웨이와 노르웨이 의회가 중재와 협상을 통해 각종 국제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기여했고 노벨이 이같은 노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세째, 노벨 자신이 당시 평화운동가였던 노르웨이 작가를 워낙 좋아해 그렇게 결정했다는 주장이다.
현재 이 세 가지 설 중 어느 것이 맞다는 견해보다는 세 가지 이유가 맞물리면서 평화상의 선정자를 노르웨이로 정한 것이 아니냐고 보는 사람이 많다.

노벨의 유언대로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1901년부터 수상자 심사와 선정을 맡게 됐고 이는 노르웨이가 1905년 스웨덴으로부터 평화적으로 독립한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됐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의회에서 선출한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위원의 임기는 6년이며 재선될 수 있다. 1977년부터 현직 의원이 위원이 되는 것을 금지했다.
노벨위원회는 수상자 선정에 있어 완전히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후보자 평가나 수상자 결정 과정에서 외부의 어떤 압력이나 지침도 받지 않으며 노벨 재단의 규정에 따라 수상자 선정과 관련된 토론내용에 대해서는 외부에 일체 발설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발표 이후에 개최되는 공공토론에도 참여하지 못 한다. 다만 50년이 되면 후보는 공개할 수 있다.

현재 노벨 위원회 위원장은 노르웨이 재무장관을 역임한 군나 베르게이고, 부위원장은 군나 요한 슈탈제트 주교이다.

▲ 선정 과정

노벨 평화상은 권위에 걸맞게 엄격하고 공정한 심사과정을 거친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 결정에 관한 전권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갖고 있다.
노르웨이 의회에서 선출된 5명의 위원에게 후보자 추천 작업, 선별 검사, 최종 결정 과정에서 독립적인 의사결정이 보장된다.
매년 10월 노벨위원회는 각국 전문가 1,000여명에 서한을 보내 평화상 수상 후보자 추천을 받는다.
서한을 받은 후보 추천위원은 다음해 2월 1일까지 추천 이유서를 첨부해 추천한다.
추천위원이 자신을 추천할 수는 없다. 후보자 명단은 대체로 공개하지 않는다.
노벨위원회는 최근 수년간 100명 이상의 후보 추천을 받았으며, 올해는 개인 115명, 단체 35개로 사상 최대의 후보가 접수됐다.

노벨위원회는 전문가의 조언을 받고 후보 범위를 좁혀가며 선별작업을 벌인다.
최종 수상자는 노벨위원회 5인 전체 회의에서 결정하며 수상자의 신원은 발표 전까지 철저히 비밀에 붙여진다.
▲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는 자격

■ 노벨위원회 전·현직 위원 및 노벨연구소의 자문관
■ 각국 의원 및 정부 각료, 국제 의회연맹 회원
■ 국제 중재재판소 및 국제 사법재판소 재판관
■ 국제 항구평화사무국 위원
■ 국제법 연구소 연구위원
■ 현직 법학, 정치학, 역사학, 철학 교수
■ 노벨 평화상 역대 수상자
▲ 평화상 시상식

노벨 평화상 시상식은 노벨이 작고한 날과 시각에 맞춰 매년 12월 10일 오후 4시 30분(현지시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다.
노벨상 6개 부문 중 5개 부문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시상식을 하지만 평화상만은 선정 과정과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에서 개최된다.
1990년 이전까지는 오슬로의 노르웨이 노벨연구소에서 평화상 시상식이 열렸으나 90년부터 오슬로 시청에서 이뤄진다.
시상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위원장이 하며, 노르웨이 국왕, 정부 각료, 국회의원, 그리고 특별 초청인사들이 참석한다.


시상식이 끝난 후엔 수상자와 특별 초청인사들을 위한 만찬이 열린다.
수상자는 노벨의 옆모습이 부조된 금으로 만든 메달과 상장, 상금을 받게 된다.
상금은 재단 수입에 따라 해마다 달라지는데 올해 수상자는 900만 스웨덴 크로나(약 10억원)를 받게 된다. 상금은 시상식 다음날 노벨 재단에서 수여된다.

수상자는 수상 후 6개월 이내에 수상 업적과 관련된 강연을 할 의무가 있다.
강연 내용은 노벨위원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개되지만 저작권은 노벨재단에 귀속된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의 특징

▲ 역대 노벨 평화상 주요 수상자

★ 단체
노벨상은 생존자 개인에게 주는 게 원칙이지만 평화상은 단체나 조직에게도 줄 수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매년 후보로 추천된 100∼150여 대상자 가운데 단체 수는 평균 20∼30개로 전체의 약 5분의 1에 달한다. 지금까지 노벨 평화상을 탄 단체는 지난해의 ‘국경 없는 의사회’를 비롯해 21개 단체에 이른다.
2000년에는 노벨상 사상 처음으로 알바니아의 작은 산골 마을 '쿠케스’가 대량의 코소보 난민을 받아들인 공로로 후보 명단에 끼었다.


★★ 사망자
생존자가 아니면서 평화상을 탄 경우도 딱 한 번 있었다.
스웨덴 출신의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다그 함마르시윌드는 1961년 비행기 사고로 콩고에서 사망했지만 그 해 평화상을 받았다.
그의 경우 생전에 수상자로 지정되어 있었다.


★★★ 정치인
평화상은 노벨의 유언에 따라 인류 화해와 분쟁 해결에 힘쓴 정치인들이 많이 받아 왔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대통령(1906), 우드로 윌슨 미국대통령(1919), 빌리 브란트 독일총리(1971), 사다트 이집트대통령과 베긴 이스라엘 총리(1978), 미하일 고르바초프 러시아대통령(1990), 미얀마 야당지도자 아웅산 수지(1991), 넬슨 만델라 남아공대통령(1993),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의장과 라빈 이스라엘총리(1994)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 인권운동가
1960년대 이후에는 인권운동가들이 수상의 영예를 누렸다.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1964),과테말라의 인디언 여성 인권운동가 리고베르타 멘추(1992) 등이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 여성
여성으로는 영구국제평화사무국 국장 폰 주트너(1905), 사회사업가이며 평화운동을 했던 제인 애덤스(1931)등 모두 9명이 평화상을 탔다.


★★★★★★ 아시아인
아시아인은 김대중 대통령을 포함해서 모두 8명이다.
첫번째 수상자는 1973년 베트남 평화 협정을 성사시킨 르둑토 북베트남 대표였다.
그러나 미국쪽 협상대표였던 헨리 키신저와 공동수상자가 된 그는 나중에 수상을 거부했다.
일본의 사토 에이사쿠 총리가 평화국 선언과 평화헌장 등으로 1974년 공동 수상했으며, 인도의 마더 테레사 수녀(루마니아 태생이지만 인도국적으로 분류됐다)는 헌신적인 봉사활동으로 1979년 단독 수상했다.
달라이 라마(1989)는 티베트의 국권 회복운동과 종교·정치지도자로 상을 받았으며,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여사(1991)는 미얀마 민주운동에 앞장 선 공로로, 동티모르의 카를로스 벨로 주교와 라모스 오르타(1996년 공동수상)는 동티모르 문제의 평화적 해결노력을 인정받아 상을 받았다.

▲노벨 평화상 상금

김대중대통령은 노벨 평화상 상금으로 900만 스웨덴 크로네 우리 돈으로 약 10억 4천만원을 받는다.
이 상금은 현행 국내 소득법 시행령 제18조1항2호에 '노벨상 또는 외국정부·국제기관·국제단체·기타 외국의 단체나 기금으로부터 받는 상금과 부상은 비과세한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에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는다.
스웨덴의 노벨 재단도 1946년 이후 면세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에 스웨덴에서도 세금을 내지 않는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은 상금을 수상 이유와 관련된 분야에 헌납한 경우가 많았다.
지난해 노벨 평화상 수상 단체인 `국경없는 의사회'는 상금을 빈민들이 전염병 예방약품이나 백신 등 필수의약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돕는 데 모두 사용했다.

1998년 북아일랜드 평화정착에 기여한 공로로 수상한 가톨릭 지도자 존 흄은 "우리의 꿈만큼이나 위대한 미래를 만드는 화합의 아일랜드를 이룩하고 싶다"며 상금 28만6000파운드 전액을 빈민과 폭력 희생자들에게 기증했다.
같은 해 빈곤퇴치 연구로 아시아에서 첫번째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가 된 인도의 아마르티아 센도 40만 달러를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빈민구제 기금으로 내놓았다.
이만 하면 님께서 요구한 질문에 답변이 되었나 모르게네요....
오늘하루도 존하루보내세요.......
p.s ▲ 김전 대통령의 추천 과정


역대 81번째, 아시아인으로서는 일곱번째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기록된 김 대통령이 노벨상에 처음 후보로 추천된 것은 1987년이었다.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가 앞장서 서독 사민당 의원 73명이 추천한 것이 최초였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추천 사유는‘한국 민주화와 인권 신장을 위한 투쟁과 3단계 통일방안을 제창해 남북 평화에 기여한 공로’였다.
이후 인권 향상과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의 공로로 매년 추천되어 올해까지 14회에 걸쳐 후보로 올랐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 동안 몇 차례나 수상 직전까지 갔었다. 대표적인 것은 지난 1992년으로 남아공의 만델라 당시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장, 데 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 등과 막판까지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재미있는 것은 1987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아리아스 산체스 코스타리카 전 대통령이 올해 김대중 대통령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한 사람들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은 매년 빠짐없이 노벨 평화상 후보에 추천됐다.
1987년의 경우처럼 초기에는 주로 그의 민주화 투쟁에 공감한 외국인들이 추천을 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맞붙어 패배한 후 수차례에 걸친 죽음의 고비와 감옥 생활 등을 거치면서도 굽히지 않았던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투쟁에 공감한 결과였다.
외국의 정치인들을 비롯해 김대중 대통령과 친분이 각별한 인사나 교수들이 추천에 앞장섰다.

예컨대, 지난 1990년엔 스웨덴 웁살라대 닐 엘반더 교수를 비롯한 스웨덴 프랑스 노르웨이의 학자, 정치인, 문인 등 35명이 김대중 대통령을 추천했고, 스웨덴 사회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추천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로마 바티칸 주교단체, 미국 가톨릭 계열 대학, 엠네스티 등 해외 인권단체 등도 자주 추천한 단체들이다.

노벨 평화상 추천 자격은 노벨위원회 전현직 위원과 노벨연구소 자문위원, 각국의 현직 각료와 의원, 국제사법재판소 및 국제중재재판소 재판관, 정치학·법학· 철학·역사학 전공학자, 역대 노벨 평화상 수상자 등 일정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나 단체만이 가능한데, 김대중 대통령은 이들로부터 여러 해에 걸쳐 복수 추천을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그 동안 노벨 평화상에 추천된 사유는 인권과 민주주의 신장에 집중돼 있지만, 해마다 약간씩 추천 사유가 달라졌다.

예컨대, 1999년 추천 사유는 IMF 환란 극복 노력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평화 분위기를 조성한 공로였고, 올해 1월에는 아시아 국가간 관계를 발전시킨 공로로 추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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