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의 친일파" 라는 영상물은 정말 충격적이군요.
http://www.imbc.com/broad/tv/culture/cantell/vod/index,1,list1,2.html
아직도 우리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그 답을 얻었습니다.
기회주의자들이 우리 근대사의 주축이었다니, 기회주의자들로 득실거리는 자본주의 사회?
올바로 발전할 수 있을 것 같나요?
자본주의란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자율과 경쟁을 존중하는 훌륭한 시스템입니다
그러나 개인간 능력의 차이로 가진 자와 없는 자의 간극이 점점 더 벌어진다면 자본주의 사회도
경고등이 켜지는 겁니다
더구나 고등학교 때 배웠듯이 가진 자들이 그 부를 더욱 더 독과점하려고 할 때
자본주의의 붕괴만이 있을 뿐입니다.
어렵게 시작된 우리의 근대사가 이런 일본 놈들의 충실한 견종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니,
그리고 아직도 그 망령에 우매한 국민들이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우리의 미래의 비전은 찾기 힘들 것 같습니다.
만주의 친일파, 그리고 그들의 떨거지들에게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로 하여금
근 현대사 특강을 듣게 하다니...중국처럼 친일파 처단을 못한 것도 국제적으로
너무도 부끄러운 일인데, 60년이 지난 아직까지 그 잔재들이 우리의 역사를 좌지우지 하려고
하다니.....피를 토하는 심정이네요.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2071321&RIGHT_DEBATE=R2
2004년 3월 7일 (일) / 제 75 회
''만주의 친일파''
일본 제국주의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병참기지로서 괴뢰국가
만주국을 세운 이래 당시 많은 한국인이 일제에 협력했다. 만주군관학교
와 간도특설대를 필두로 협화회, 건국대, 대동학원 등 여러 분야에서
이들은 일제에 기생하여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였으며 민족을 배신하였다.
만주의 친일인맥은 해방 후 반민특위가 와해되는 가운데 친일파 청산 논의
에서 벗어나 온존했고, 분단과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으로 부상했다.
일제 만주국에서 활동한 한국인들의 친일행적을 현지취재를 통해 살펴
보고 이들이 해방 후의 한국사회에서 주류로 부상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로써 친일문제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얼마나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지를 성찰하게 될 것이다.
* 만주국은 무엇인가, 만주는 한국의 타임캡슐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만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국가였다. 일제는
왜 만주국을 세웠으며 그들은 만주국을 어떻게 경영했는가. 일제가 시도
한 병영국가, 통제국가 만주국은 5.16 이후 한국 사회에서 거의 완벽하게
재현된다. 만주국의 당시 수도 신경(현재의 장춘)에서 건설과정과 운영
실태 등을 만주국 당시의 선전 영상물(만영시보, 만영통신)을 통해 들여다
본다. 독립군과 팔로군, 소련군에 대비하는 국민동원체제나 관동군이
주도하는 철저한 계획경제식의 통치 운용 등 30년대 만주의 상황은 70년대
한국사회와 상사관계에 놓이고 있다.
* 만주의 친일인맥
일제는 한반도의 반일투쟁을 진압하고 안정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고
세계대전의 준비를 위해 만주를 침탈하였다. 만주는 그들에게 생명선
이자 방파제였다. 이후 일본에 순치된 많은 조선인이 만주를 향하였다.
괴뢰국가 만주에 협력하는 것은 사실상 일제를 돕는 적극적인 친일행위
에 해당한다. 항일 투쟁을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간도특설대를 창설
한 이범익, 만주군관학교 출신 박정희, 정일권, 백선엽 등을 비롯하여
친일어용조직 협화회에 참여한 윤필상, 이선근, 건국대 교수 최남선 등의
인물들이 이 시기에 만주에서 활동했다.
그들은 만주에서 무엇을 했으며 그들의 행위가 오늘의 이 시점에서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 것인지 중국인들은 당시 일부 조선인(한국인)들이
한 행위를 소상히 기억하고 있다. 일본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며 유사
가해자의 위치에 있었던 친일파들을 중국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
* 박정희 만주군관학교 동창생들 현지 인터뷰
만주 친일파의 흔적을 추적해 간 중국 동북지역에는,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박정희의 중국인 동창생들이 생존해 있었다. 그러나 같은 군관
학교를 나왔지만 해방 후 그들의 행로는 달랐다. 중국에서는 공산당
지역이나 국민당 지역이나 한간(漢奸, 민족배신자)들을 청산하는 절차
를 밟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조선학생들 그리고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 대한 육성 증언을 들어보았다.
* 한일협정에는 만주 친일파가 있었다.
1963년 8월 1일. 박정희는 일본의 전 수상, 기시 노부스케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 전달자는 만주에서 화신 백화점을 운영하던
박흥식이었다. 반민특위 검거 1호였던 반민족 친일파, 박흥식 그리고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 박정희는 한일회담의 막후에서 왜 대표적인
친일파, 박흥식을 전달자로 택했으며 기시 노부스케와는 어떤 관계가
숨어 있었나? 만주 친일파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친일행동이 1930,
40년대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승만 정권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박정희 정권하 한일 수교 국면에서 한일 유착의 커넥션으로
부활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은 만주 친일파의 부정적 유산에서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지 방송된다.
http://www.imbc.com/broad/tv/culture/cantell/1405168_159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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