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우중 전 회장은 어떤 사람인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세계경영’ 신화의 명멸 출발선은 지난 67년 3월 ‘청년 김우중’의 대우실업 창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 무역부장으로 있던 31세 청년이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잡고 대우그룹의 잉태를 예고한 것이다.
대우(大宇)라는 상호도 대도섬유의 대(大),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자본금 500만원의 대우실업은 창업 첫해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팔아 58만 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린 데 이어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큰 성공을 거뒀다.
트리코트 원단과 와이셔츠 수출로 대우그룹 축성의 종잣돈을 마련한 그에게는 ‘트리코트 김’이라는 별칭이 따라붙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이카루스의 꿈’은 의욕적인 창업보다는 왕성한 기업 사냥을 통한 ‘다계열, 다업종’ 확장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으로 73년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달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대우를 출범시켰다.
또 76년에는 한국기계를 흡수해 대우조선으로 개편한 옥포조선소과 묶어 대우중공업을 만들었고, 앞서 74년 인수한 대우전자와 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뭉쳐서대우전자를 그룹의 주력으로 성장시켰다.
동양증권과 삼보증권도 사들여 83년 대우증권으로 터를 잡았다.
그 뿐만 아니라 74년에는 교통부가 서울역 건너편에 짓다가 만 교통회관도 챙겨 지금의 대우센터라는 그룹의 거점을 확보했다. 이같은 급속한 외형확장의 결과 72년 수출 5위라는 눈부신 기록을 남긴데 이어 창업 15년만에 대우를 자산순위로 따져 국내 4대 재벌로 성장시켰다.
김우중 전 회장은 특히 금융과 해외영업에서 남다른 수완을 발휘하면서 압축적 고속성장에 주력한 ‘박정희 정권’에서 가장 두드러진 기업인으로 주목받았다. 전직 고위관료와 한국은행ㆍ산업은행 출신 금융인들을 다수 포진시켜 급속한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금융조달 및 정부지원 등을 이끌어 냈으며 이는 나중에 ‘정경유착’ 의혹을 불러 일으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70년대 무섭게 입지를 넓힌 그는 80년대 중반 한때 대우조선 경영악화와 노동쟁의 등 난관에 부딪히면서 부도설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80-90년대 내내 세계경영을 화두로 내걸고 ‘성장일변도’ 전략을 구사했다.
특히 90년대들어 과거 사회의주권 국가였던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세계경영을 본격화했다. 이 결과 93년말 185곳에 불과했던 해외 네트워크가 98년말에는 396개 현지법인을 포함해 모두 589곳으로 늘어났고 해외고용 인력도 2만2천명에서 15만2천명으로 불었다.
우즈베키스탄의 카리모프 대통령은 당시 그를 ‘킴기즈칸’이라 부르기도 했다.
당시 김우중은 연간 해외 체류기간 280일을 넘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운동권 출신 특채는 파격적 발상의 일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92년 대통령선거 출마설과 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사건 등으로 시련의 계절을 맞으면서 크게 흔들리기도 했지만 당시만 해도 대우 신화는 계속됐다.
그러나 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돌입은 대우 신화의 붕괴를 예감하게 하는 결정적인 신호탄이었다.
국가신용등급 추락의 여파로 해외 채권자들로부터 극심한 상환압력을 받게 된데다 해외 자산에서 가공할 타격을 받으면서 세계경영의 허점이 노출된 것이다. 특히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의 갈등과 마찰이 쇠락을 재촉했다.
김우중은 98년 1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 환란위기 극복을 위한 500억 달러의 무역흑자론을 내세워 수출과 해외부문이 강한 대우의 강점을 일반화시킨 ‘국가 프로젝트’ 변경을 주창했다.
이같은 주장은 김 당선자의 공감을 어느 정도 얻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관료들은 이에 대해 ‘대우의 생존전략’이라는 의심의 눈길을 보내면서 IMF 프로그램에 의한 부채비율 축소 등에 강조점을 찍었다. 이런 가운데 김우중은 98년 3월 전경련 회장을 맡아 재계의 얼굴로 나서는 승부수를 던지면서 ‘수출론’을 집중 부각시켰으나 관료들과는 여전히 평행선을 달렸고,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맞았다.
그러다가 98년 당시 그룹 구조조정의 최우선 핵심사안으로 꼽혔던 대우차-GM 합작 추진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금융감독위의 기업어음(CP) 발행한도 제한 조치에 이어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비상벨이 울린 대우그룹은 99년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도 발표했으나 일파만파의 자금난을 극복하고 새 출발을 다지기에는 시간도, 역량도 부족했다.
결국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그는 99년 8월 대우그룹 모든 계열사들의 워크아웃이라는 극약 처방을 받았고, 그해 10월 중국 공장 방문 이후 귀국하지 않은 채 지금껏 5년10개월째 도피 행각을 벌여왔다.
출처 : http://www.chosun.com/economy/news/200506/200506120242.html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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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전 회장은 31살이던 지난 67년, 자본금 5백만원으로 서울 명동에 대우실업 간판을 세웠습니다.
자본금 중 절반은 빌린 돈으로 사실상 무일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70년대 들어 한국경제가 한강의 기적을 일궈나가면서 대우그룹도 초고속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99년 공식 해체되던 당시 대우그룹은 총고용인원 15만명, 계열사 41개,국외법인 396개의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큰 기업이었습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일년의 3분의 1이상을 해외에서 보내고 비행기를 침실겸 사무실로 여기던 김 전 회장의 도전정신이 성공의 밑바탕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김 전 회장의 어두운 면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문어발식 확장으로 그룹의 덩치를 키우는데만 주력하는 바람에 계열사 부실을 피할 수 없었고, 이를 감추기 위해 41조원의 분식회계를 지시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김 전 회장은 하루아침에 성공신화의 주인공에서 우리 경제의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린 주범으로 전락한 채 99년 10월 쓸쓸히 해외유랑길에 올랐습니다. 이 때 김 전 회장은 대우직원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대우의 밝은 미래를 위해 어두운 과거는 스스로 짊어지고 가겠다"고 밝혔습니다. 시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고도성장시대의 경영을 답습하다가 끝내 모든 것을 잃고 만 실패한 경영인의 뒤늦은 후회였습니다.
출처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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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우그룹이 붕괴한 이유
대우의 분식회계가 적발되었을 때 담당 회계법인사는 파산하고 관련 회계사들은 구속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회계사들과 대우와의 암흑의 거래가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회계사들에게 뇌물을 주고, 분식회계를 지시하여, 국가경제를 파탄시켰으니 그에 대한 벌을 받은 셈이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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