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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역사/유적

숭례문이 국보인 까닭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4가에 위치한 조선시대 초기의 대표적인 성문인 남대문 왜 남대문이 국보 제1호가 됐을까? 우선 1호, 2호하는 지정번호는 가치의 높고 낮음을 표시한 것이 아니고 지정된 순서를 말한다. 그러나 동대문은 보물로 지정되고 남대문이 국보로 지정된 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출입문으로 대문(大門) 4개와 소문(小門) 4개가 세워졌다. 대문으로 동쪽은 흥인지문(興人之門), 서쪽은 돈의문(敦義門), 남쪽은 숭례문(崇禮門), 북쪽은 숙청문(肅淸門)을 두었으며, 소문으로는 동북쪽에 혜화문(惠化門), 서북쪽에 창의문(彰義門)-자하문(紫霞門), 동남쪽에 광희문(光熙門)-수구문(水口門), 서남쪽에 소의문(昭義門)을 두었다. 이러한 많은 문 중에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동대문과 남대문뿐이.. 더보기
국보 제1호 - 서울 숭례문(崇禮門)에 대한 자세한 설명&사진포함 우리나라의 국보 제 1호인데 설명이 비교적 부족한 듯 하여 설명을 보충하여 다시 올립니다.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에 있는 조선시대 성문. 지정번호 국보 제1호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4가 시대 조선시대 종류 성문 [정면도]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지붕 다포(多包)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며 원래의 이름은 숭례문(崇禮門)이다. 1394년(태조 4) 창건되었으나 지금의 건물은 1447년(세종 29)에 개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이 문은 중앙부.. 더보기
서울숭례문 (서울崇禮門) 서울숭례문 (서울崇禮門)종목 : 국보 제1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 : 1동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중구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더보기
스티브잡스의 스탠포드대 졸업 축사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 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더보기
한국사 10대 미녀 1. 관나부인(貫那夫人) "서해로 흘러간 장발 미인" 〔고구려 중천왕〕 관나부인은 얼굴이 아름답고 두발이 길었다고《삼국사기》에서 전한다. 관나부인이 왕의 총애를 받게 되자, 이를 시기한 왕후 연씨(椽氏)는 "지금 위(魏)나라에서 천금을 주고 장발을 구한다 하니 장발미인을 위나라에 보내면 다시는 우리 나라를 침범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관나부인을 위나라로 보내려고 하였다. 이것을 들은 관나부인은 왕에게 "왕후가 나를 가죽 주머니에 넣어 바다에 버리려고 하니 집에 돌아가게 하여 주십시오"라며 왕후를 참소하였다. 하지만 왕은 그 사실이 거짓임을 알고 정말로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서해(西海)에 던져버렸다. 2. 도미(都彌)의 처(妻) "일편단심 민들레" 〔백제 개루왕〕 도미의 처(이하 처)는 백제.. 더보기
열기구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열기구의 역사 새처럼 하늘을 날아보고자 했던 우리 인간의 욕망을 맨 먼저 이루게 한 것은 '연기'라는 뜨거운 공기였다. 프랑스의 조셉 몽골피에 형제는 화톳불에서 힘차게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는 뜨거운 연기를 보고 '연기를 큰 주머니에 담으면 주머니도 하늘로 올라 갈 수 있겠지'하고 생각했다. 종이장사를 하던 몽골피에 형제는 지름이 10m나 되는 큰 종이 주머니를 만들어 마침내 1783년 6월 프랑스 아노네이에서 1차 공개 실험을 했다. 이날 공개 실험에서 큰 종이 주머니 기구내부에 뜨거운 연기를 불어넣었다. 기구 내부의 온도가 87.5℃까지 올라가자 부력이 발생해 기구가 약 180m 상공까지 떠올랐다. 그 해 9월에는 열기구에 양과 닭 그리고 오리 등을 태운 2차 실험에도 성공했다. 드디어 2개월 뒤인 1.. 더보기
세기의 미인들 1) 춘추전국시대의 서시 (西施) 침어(浸魚) -서시(西施)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먹다 " 서시는 춘추말기의 월나라의 여인이다. 어느 날 그녀는 강변에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강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 을 비추었다. 수중의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래서 서시는 침어(浸魚)라는 칭호 를 얻게 되었다. 서시는 오(吳)나라 부차(夫差)에게 패한 월왕 구천(勾踐)의 충신 범려(範려)가 보복을 위해 그녀에게 예능을 가르쳐서 호색가인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다.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사로잡혀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어 마침내 월나라에 패망하였다 2) 한나라의 왕소군 (王昭君) 낙안(落雁) -왕소군(王昭君) "기러기가 날개움직이는 것을 잃고 땅으로 떨어지다 " 한(漢)나라 .. 더보기
궁녀(宮女)에 대한 기록이 적은 이유.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의자왕 16년조에 '봄 3월에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成忠)이 극력 말렸더니, 왕이 성을 내며 그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는 기사에서 보면 한국사에서 궁녀는 적어도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2000년 가까이 실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같은 기록에 나타나는 삼천(三千)궁녀는 좀 지나친 과장이라고 보고 적당히 추측하더라도 수백 명은 늘 상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의궤」 등 세계적인 역사적 기록들이 풍부합니다. 이렇게 유구한 역사와 방대한 역사적 기록이라면 궁녀에 관한 자료가 다양할 거라고 예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