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泰院', '利泰院'이라고도 쓴다. 대개 역원(驛院)을 두면 그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고 마을의 이름도 원의 이름을 따라 부르는 일이 관례처럼 되어 왔다. 서울 남산의 남쪽, 지금의 용산구 이태원동의 동북쪽에 역원 이태원을 두었는데 그 주변에 마을이 생기자 이 마을의 이름도 이태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1907년(융희 1) 이곳의 개발을 위하여 주민들을 당시 경기도 고양군 구역 내로 이주시키고 그 마을 이름도 이태원이라 하였다.
처음의 이태원은 일본인 전용 거주지로 조성, 이름을 수도정(水道町) 2정목(二丁目)이라 하였으나 주민들은 '이태원'이라 불렀다. 1922년 4월 경성부(京城府)의 확장에 따라 이태원리는 경성부에 편입되고 그때까지 경성부와 고양군의 경계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나뉘었던 2개의 이태원은 하나로 광역화하여 지금의 용산구 이태원동이 되었다. 6·25전쟁을 거친 후 미군 부대의 재배치, 미8군사령부가 인근에 있어 미군들의 위락지대로 번창하기 시작하였고, 그후 점차 외국인 관광객의 쇼핑과 관광의 명소로 발전하였다.
------------네이버 사전..;;
한편 주요 역로를 따라서는 역원 취락(驛院聚落)이 발달했다. 역은 공문서의 전달과 관리의 내왕(來往), 관물(官物)의 수송 등을 주로 담당했고, 원은 관리나 일반 여행자에게 숙박 편의를 제공했다. 따라서 역(驛)∼, ∼원(院) 등의 한자가 들어가는 지명은 과거에 육상 교통이 발달했었던 곳이다. 서울의 역삼동(驛三洞), 역촌동(驛村洞)과 이태원(梨泰院), 퇴계원(退溪院) 등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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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500여년전 임진왜란 때, 그러니까 선조25년(1592년) 평양에서 조· 명(朝·明)연합군에 밀리던 고니시(小西行長)의 부대와 가토오(加藤淸正)의 부대가 용산에 주둔한뒤 이태원동에 있는 운종사(雲鍾寺)라는 비구니들이 수도하는 가람을 습격하기에 이른다. 왜적들을 수도하는 여승들을 겁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왜군이 퇴각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조정은 운종사 여승들과 같이 왜적의 아이를 낳은 부녀자들을 벌하지 않고 이곳에다 오늘날 보육원과 같은 것을 지어 아이들을 기르게 하였다. 말하자면 ‘태(胎)가 다른 이방인의 집’이라는 뜻으로 ‘이태원(異胎院)’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임진왜란 때 항복한 왜군들이 우리 나라에 귀화한 뒤 여기에 모여 집단생활을 하였으므로 이곳을 이타인(異他人)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오늘의 땅이름이 이태원(異胎院)이 아닌, 이태원(梨泰院)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효종 때. 이곳에 배나무를 많이 심으면서 땅이름이 동음이의(同音異意)가 된 내력이다. 남산을 등지고 앞에는 한강수가 그림같다. 멀리는 관악, 청계산, 남한산이 한 눈에 들어와 서울에서도 조망이 빼어 나기로 이름난 곳이다.
이태원은 조선조 중기부터 외국인들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기에‘이타인’(異他人), ‘이태원’(異胎院)이란 땅이름을 낳았고 6·25동란 이후에는 한동안 양공주들의 거리로 이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겼다. 지금은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우리 나라를 찾는 외국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국제적인 쇼핑타운이기도 했지만. 특히 88 서울올림픽을 치른 후로는 땅이름 처럼 ‘태(胎)가 다른(異 )’ 이방인들의 거리로 변모했으니 국제화 탓일까! 땅이름 탓일까!
이흥환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처음의 이태원은 일본인 전용 거주지로 조성, 이름을 수도정(水道町) 2정목(二丁目)이라 하였으나 주민들은 '이태원'이라 불렀다. 1922년 4월 경성부(京城府)의 확장에 따라 이태원리는 경성부에 편입되고 그때까지 경성부와 고양군의 경계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나뉘었던 2개의 이태원은 하나로 광역화하여 지금의 용산구 이태원동이 되었다. 6·25전쟁을 거친 후 미군 부대의 재배치, 미8군사령부가 인근에 있어 미군들의 위락지대로 번창하기 시작하였고, 그후 점차 외국인 관광객의 쇼핑과 관광의 명소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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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주요 역로를 따라서는 역원 취락(驛院聚落)이 발달했다. 역은 공문서의 전달과 관리의 내왕(來往), 관물(官物)의 수송 등을 주로 담당했고, 원은 관리나 일반 여행자에게 숙박 편의를 제공했다. 따라서 역(驛)∼, ∼원(院) 등의 한자가 들어가는 지명은 과거에 육상 교통이 발달했었던 곳이다. 서울의 역삼동(驛三洞), 역촌동(驛村洞)과 이태원(梨泰院), 퇴계원(退溪院) 등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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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500여년전 임진왜란 때, 그러니까 선조25년(1592년) 평양에서 조· 명(朝·明)연합군에 밀리던 고니시(小西行長)의 부대와 가토오(加藤淸正)의 부대가 용산에 주둔한뒤 이태원동에 있는 운종사(雲鍾寺)라는 비구니들이 수도하는 가람을 습격하기에 이른다. 왜적들을 수도하는 여승들을 겁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왜군이 퇴각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조정은 운종사 여승들과 같이 왜적의 아이를 낳은 부녀자들을 벌하지 않고 이곳에다 오늘날 보육원과 같은 것을 지어 아이들을 기르게 하였다. 말하자면 ‘태(胎)가 다른 이방인의 집’이라는 뜻으로 ‘이태원(異胎院)’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임진왜란 때 항복한 왜군들이 우리 나라에 귀화한 뒤 여기에 모여 집단생활을 하였으므로 이곳을 이타인(異他人)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오늘의 땅이름이 이태원(異胎院)이 아닌, 이태원(梨泰院)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효종 때. 이곳에 배나무를 많이 심으면서 땅이름이 동음이의(同音異意)가 된 내력이다. 남산을 등지고 앞에는 한강수가 그림같다. 멀리는 관악, 청계산, 남한산이 한 눈에 들어와 서울에서도 조망이 빼어 나기로 이름난 곳이다.
이태원은 조선조 중기부터 외국인들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기에‘이타인’(異他人), ‘이태원’(異胎院)이란 땅이름을 낳았고 6·25동란 이후에는 한동안 양공주들의 거리로 이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겼다. 지금은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우리 나라를 찾는 외국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국제적인 쇼핑타운이기도 했지만. 특히 88 서울올림픽을 치른 후로는 땅이름 처럼 ‘태(胎)가 다른(異 )’ 이방인들의 거리로 변모했으니 국제화 탓일까! 땅이름 탓일까!
이흥환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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