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의자왕 16년조에 '봄 3월에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成忠)이 극력 말렸더니, 왕이 성을 내며 그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는 기사에서 보면 한국사에서 궁녀는 적어도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2000년 가까이 실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같은 기록에 나타나는 삼천(三千)궁녀는 좀 지나친 과장이라고 보고 적당히 추측하더라도 수백 명은 늘 상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의궤」 등 세계적인 역사적 기록들이 풍부합니다. 이렇게 유구한 역사와 방대한 역사적 기록이라면 궁녀에 관한 자료가 다양할 거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한한 일이지만 2000년을 이어 온 방대한 역사기록에서 많았어야 할 궁녀에 관한 자료는 상당히 찾아보기 힘듭니다. 심지어 왕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사사건건 간섭하고, 시비를 걸었던 관료들도 궁녀문제만은 언급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간혹 고지식한 군신들이 왕에게 여색(女色)을 멀리 해야 한다는 점잖은 충고를 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그리고 이 정도의 자료를 갖고서는 궁녀의 실체를 밝히는데 그리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왕조시대의 궁녀는 왕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거론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는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궁녀에 대해 알려고 하거나 아는 척하는 것은 왕과 관련된 심각한 금기를 건드리는 민감하고도 위험천만한 행위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대의명분을 내세워 왕에게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았던 신료들이 궁녀문제만은 언급을 회피했던 이유가 무엇이며, 궁녀의 어떤 부분이 왕과 관련된 심각한 금기였는지 의문이 듭니다. 중국 전국시대의 제자백가의 일원이었던 한비자(韓非子)는 왕에게 아뢸 때, 꼭 명심해야 할 사항으로 역린(逆鱗)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유세가(遊說家)는 온갖 조화를 부리는 용(龍), 즉 왕을 설득하여 자신의 뜻을 펼쳐야 하지만 자칫 잘못하여 이 역린을 건드리면 설득은 커녕 그 자리에서 용에게 죽음을 당하기 십상이라고 했습니다. 역린은 용의 목 아래 거꾸로 박힌 비늘을 가리키는 말로 왕의 약점이라는 뜻입니다. 즉 왕에게 간언할 때,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금기사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궁녀는 바로 왕에게 역린과 같은 존재였던 셈입니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사람들은 궁녀가 왕의 역린이라는 것을 감지하여 제 정신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궁녀문제를 공개적으로 먼저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과거 동양문화권 남자들 사이에서 집안에서의 여자문제는 서로 건드리지 말아야 할 일종의 프라이버시, 즉 역린과 같은 영역이었습니다. 남자들은 자기 집에서도 궁궐에서의 궁녀에 해당하는 첩이나 여종 등의 문제는 정실부인의 몫이라며 간섭하지 않았고, 다른 집안의 처첩이나 여종에 관한 일을 가지고 아는 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왕의 프라이버시에 속하는 궁녀문제 역시 역린처럼 간주되어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가 어려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궁녀에 대한 논의가 금기시된 또 다른 이유는 왕권이라는 또 다른 측면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왕은 온 백성들의 스승이자 어버이인 완벽한 인간으로 받들어졌습니다. 왕은 인간의 심층에 뿌리 박힌 동물적인 욕망을 초월한 인간이라고 보고 백성들이 숭배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조시대에 완벽한 인간이라는 왕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반역행위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한비자는 냉철하게 왕과 신하의 권력관계를 분석하고 왕의 이미지와 관련하여 '하늘을 나는 용은 구름을 타고, 높이 오르는 이무기는 안개에 노닌다. 그러나 구름이 걷히면 용이나 이무기는 지렁이와 다를 것이 없다. 왜 그런가? 타고 노는 구름과 안개를 잃었기 때문이다.'라고 역설했습니다.
이것은 용이 용인 이유는 구름을 타고 있기 때문이며, 구름 속에 가려진 왕은 마치 용처럼 신비한 조화를 마음껏 부릴 수 있지만 제 아무리 용이라도 구름을 잃는 순간, 미천한 지렁이와 같아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구름은 왕의 절대권력과 신성한 이미지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절대권력을 잃은 왕, 완벽한 인간이라는 신성한 이미지가 해체된 왕은 무지렁이 백성들보다 더 처참하게 나락에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궁녀를 거론하려면 필연적으로 왕의 내밀한 생활을 들출 수 밖에 없는데, 그러면 왕에 따라서 여색을 탐하거나 국사를 소홀히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먹일 수 있습니다. 여색을 탐하고 국사를 소홀히 하는 왕보다 더 심각하게 신성한 왕의 이미지를 해치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궁녀를 거론하는 사람은 의도했든 안 했든 필연적으로 왕도 별 수 없이 욕망이 있고 놀고 싶어하는 그저 그런 인간이라고 공개하는 셈입니다. 게다가 그러면 안 된다는 식의 훈계까지 했다면 왕의 역린을 가장 심하게 건드린 경우가 됩니다. 또한 궁녀는 궁중의 비밀 뿐만 아니라 왕의 온갖 버릇과 약점에 정통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궁녀문제를 논하려는 것은 왕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려는 시도이고, 그것은 곧 무언가 역심을 품은 의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18세기 대학자 이익(李瀷)은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요사이 들으니 내시와 나인이 날로 늘어난다고 한다. 그런데도 외조에서는 간섭할 일이 아니라 하여 막대한 국가 비용이 쓰이는 데도 감히 말 한 마디 못한다고 한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익은 궁녀가 684명이며 환관이 335명으로 모두 1000명이 넘었으며, 이들에게 들어가는 국가 경비가 1년에 쌀 11430석이나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중앙의 양반 관료는 모두 합해서 5000명이 채 되지 않았으며 이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은 10만 석 정도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궁녀와 환관이 1000명이 넘고 양반보다 호구지책(糊口之策)이 용이하며 미천한 이들에게 1만 석 이상을 소비한다는 사실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이 문제를 거론하지 못한다며 심경을 밝히고, 어느 누구도 궁녀문제를 발설치 않는 것을 개탄한 겁니다. 그러나 이익도 자신의 문집에서 혼자 한탄했을 뿐 공개적으로 왕에게 상소를 올리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조선시대에만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시대에도 별 차이는 없습니다. 따라서 다소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관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먼저 나서서 공개적으로 궁녀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방대한 역사기록에 궁녀에 관한 자료들이 그토록 적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녀들이 공식적인 역사의 기록에서는 의도적으로 배제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궁녀의 실체를 찾으려면 감추어야 하는 비밀을 무심결에 남겨놓은 비공식적인 역사의 기록들을 찾아서 공식적인 역사의 장으로 끄집어 올려야 가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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