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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역사/유적/국내 관련

유관순(柳寬順 : 1902 ~ 1920) 열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

 유관순열사는 1902년 3월 15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의 작은 마을에서 유중권씨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중권씨의 부친은 어우당 유몽인의 10대 손이니 유몽인은 문장가로서도 유명하지만 광해군(光海君)이 실각할 때 광해군에게 충성을 바친 오직 한 분의 경골한이다. 유중권은 일찍 개화에 눈을 떠 땅을 팔아 흥호학교(興湖學校)를 세워서 새 문명을 보급한 선각을 지닌 분이었다. 유중권은 개신교에 관심을 가지고 서양인 선교사와 접촉한데서 개화문명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런 부친의 영향을 받아 유관순 열사는 어려서부터 신앙이 돈독하였다.
 

기독교를 일찍 받아들여 개화한 집안으로 마을에서도 존경과 칭찬을 받는 고흥 유씨의 가문이었습니다. 유관순열사는 이런 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았고, 또 자랐으며 성격은 적극적이고 감수성이 몹시 예민했습니다. 타인에 대해서도 정열적이었고 한번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굽히지 않고 관철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관순열사가 9살 되던 해에 우리나라는 일제에 병합되어 국권이 기울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유관순열사는 이런 일을 보며 자랐고 배일의 사상이 싹텄으며 부친에게 기울어진 민족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전 혼과 마음을 불태울 이념과 정신도 공급 받았습니다.

 

틈만 있으면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인 유중권씨는 큰아들 우석(관옥)과 관순을 위해 기도하며 가르쳤습니다. "장차 너희들은 부지런히 공부하여 민족의 일군이 되어야 한다."고 간곡히 부탁을 하였습니다. 관순은 아버지의 이런 말씀을 들을 적마다 어린 마음이지만 민족 독립 정신이 서서히 불붙고 있었습니다.

 

유관순은 공주의 영명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하다가 14살 때인 1916년 봄 기독교 감리교 충청도 교구 본부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의 주선으로 교비장학생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였습니다. 이화에는 관순의 4촌언니 애더(유예도)가 먼저 다니고 있으며, 이화에 들어온 관순은 말로만 듣던 신학문과을 배우고 깨치우는 것과 종교적 배움을 통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로부터 2년 후인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 3학기 때 유관순열사는 이때 마침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 독립선언이 선포되고 수많은 군중이 일본 헌병과 맞서다가 살상되고 체포되는 실로 형용하기 어려운 참상을 겪게 된다.

  

이후 선배들과 결사대를 조직하여 3월 5일 남대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총독부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곧 독립선언서를 감추어 가지고 귀향 하였다. 고향에 돌아와 보니 당시 병천에서는 아직 잠잠하여 아무런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여 만세 운동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유관순 열사는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병천(竝 川), 목천(木川), 천안(天安), 안성(安城), 진천(鎭川), 청주(淸州) 등지의 교회학교와 유림을 찾아 다니며 음력 3월 1일에 총 궐기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종용하여 약속을 얻어냈다.

 

이때 일본 헌병대와 그 보조원이 벌이는 검열이 심하여 여행이 어려웠는데 유관순열사는 나이 어린 처녀라 별 의심없이 통과시키더라는 것이다. 유관순의 활약에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물론 아버지 류중권이고 다음으로 진명학교(進明學校) 김구응(金球應)선생이시다. 김구응은 당시 진명학교 교원일뿐 아니라 장명 감리교회 강습소에서도 교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신문명을 일찍 흡수한 선각자였다. 김구응선생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여 마음이 편치 않았었다. 그는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항쟁과 각지의 만세운동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신문이 폐간되어 정확한 바깥소식을 알 수 없었다. 이때 유관순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와 김구응선생과 거사할 것을 상의하니 김구응선생은 쾌히 승낙하고 준비에 나선 것이다.


아주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우리 민족의 강렬한 의지를 일본 정부에 전달하자며 병천같은 좁은 곳에서만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보다 인근 각지에서 일제히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 생각하여 인근 각지에 연락하였다. 연락의 중임을 유관순 열사가 맡고 김구응선생은 병천에서 모든 주선을 하였다. 유관순열사는 낮에 먼 길을 온종일 걷고도 밤에는 동지들과 태극기를 만드느라 밤을 세웠다.

 

드디어 거사일로 정한 음력 3월 1일의 하루전인 2월 그믐날 저녁 지령리 뒷산인 매봉에 올라가 횃불을 높이 올렸다. 이 횃불이 내일의 거사 신호이며 밀약된 동지들과의 연락 신호이었었다. 이 에 의하여 일곱 개의 횃불이 타오르니 원근 각지의 산봉우리에서 응신하는 횃불이 모두 24개소나 타 올랐다 한다. 이것으로 거사 계획이 무리없이 진행되었다.

 

음력 3월 1일 아침해는 밝아 왔다. 아침해를 신호로 이곳 저곳에서 백의의 우리 민족들이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하여 아우내장터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운집한 인원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아우내장터가 열린 이래 가장 많은 인파가 모였다. 이때 유관순은 밤새워 그린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약속 시간인 정오가 되자 유관순열사는 앞에 나서서 비장한 연설을 하자 군중들은 일제 독립만세를 외쳐 의기는 하늘에 충천하였다. 이에 당황한 천안헌병대 아우내분견대 고야마(小山) 소장은 칼을 빼어들어 군중을 진압하던중 이때 군중의 앞장에서 만세를 부르던 김구응에게 총을 쏘았다. 탄환이 명중한 김구응은 높이 솟아 오르더니 땅에 고꾸라졌다 한다. 이를 목격한 김국응의 모친 최씨부인은 지팡이로 왜헌병의 머리를 때리며 꾸짖다가 왜병의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이날 최씨부인은 아들이 만세운동에 동조하여 마을 아낙들을 데리고 나와서 만세운동을 부르다가 아들의 참사를 보고 왜병과 맞서다가 모자가 함께 순국한 기록을 남긴 것이다.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김구응이 참살당할 때 한손에 독립선언서를 말아 들고 있었다 한다. 그렇다면 독립선언서는 김구응이 낭독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유관순 전기는 한결같이 유관순열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고 전하니 김구응의 손에 독립선언서가 들려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당시는 확성기 장치가 없어 많은 군중에게 도달하도록 말을 전달할 수 없으니 유열사는 유열사대로 김구응선생은 김구응선생대로 독립선언서를 군중에게 낭독해 들려주었을 가능성이 짙다. 당시 사정으로 보아 의식절차에 따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수는 없었을 터이니 망국의 울분을 가슴 가득히 간직한 군중이 모여 지도자에 따라 목청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을 뿐이다.

 

이렇게 평화적으로 시작한 시위운동이 무장한 일본 헌병의 발포 살상에 흥분하여 폭력으로 변한 것이 대부분의 사례이다. 아우내장터의 시위군중도 동지요 지도자의 죽음으로 흥분은 극도에 다달아 무장한 고야마를 결박하고 헌병 분견대를 점령하였다. 이런 급보를 전해들은 천안 헌병대 본부에서는 곧 달려와 시위 군중에게 무차별 사격을 하니 그들의 만행은 여기에서도 드러났다.

 

아우내장터에서 부모의 죽은 시체를 뒤에 두고 헌병에게 끌리어 천안 헌병대에 압송 되었다가 공주검사국으로 넘어간 유관순은 헌병대에 이끌려 가면서도 길에서 사람만 만나면 독립만세를 불렀다. 또 공주로 압송되는 도중에서도 여전히 독립만세를 외쳐 조금도 기가 꺽이는 일이없었다. 만세를 부를 때마다 모진 매를 맞았으나 그는 굽힐줄을 몰랐으며 공주에서 재판을 받는 중에도 계속 투쟁을 하였고 다른 죄수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는데 열을 오렸다. 공주 검사국에서 기소되어 공주지방법원에 넘어가 재판을 받았다. 이 재판에서 7년 구형에 3년 징역의 선고를 받았다. 다시 항고가 되어 당시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원심대로 처리되었다. 이때 누가 항고 또는 상고하였느냐가 의문이 된다. 이 재판에는 관선 변호사 정도가 참가했을 것이어서 변호사의 참가는 재판의 구색을 갖추는데 불과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7년을 구형하였는데 법원이 3년밖에 선고하지 않았으므로 검사가 상고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경성복심 법원에서 재판장이 또한 원심대로 3년의 징역을 신고하였다. 그러나 유관순 열사는 재판 때마다 결연히 재판을 거부하였다. 거부한 까닭은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그 백성을 잡아다 재판하는 것은 사리에 부당하며 나는 우리 조국의 독립을 외쳤을 뿐이니 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여 법정 모독죄가 가중되어 다시 7년징역으로 확정되었다.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틈만 있으면 독립만세를 불러 가혹한 형벌을 받아서 온몸이 한 곳도 성한데가 없었다.

 

유관순 열사의 오라버니 관옥이 옥중에서 풀려 집에와 있었는데 1920년 10월 12일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보낸 사체인수 통지가 날라와 깜작 놀라 달려가니 유관순열사는 관속의 시체로 변해 있었다. 형무소내에서 만세를 부르는 유관순 열사를 옥리가 가혹한 형벌을 가하여 끝내 숨을 거둔 것이다. 이때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영결하려고 관 뚜껑을 열어보니 시체가 토막이 나 있더란 것이다. 어찌 그토록 잔인할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왜인의 잔학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실례라 할 수 있다. 옥중 생활 1년반의 세월이 흘렀고 유관순 열사의 나이 18세의 꽃다운 청춘이었다. 유관순 열사의 관은 이화학당에 인도되어 스승과 동문들이 손에 의하여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유관순 열사의 유해는 서명학, 서은숙 두 동창생이 태극기를 가슴에 덮어주고 정동예배당에서 영결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유해는 김종구목사와 박노철 선생과 오라버니 관옥과 관옥의 친구 23인에 의하여 운구되었으며 뒤에는 미스월터 교장과 김활란 박사가 조용히 따랐다. 유해는 이태원공동묘지에 안장하는 이 날이 바로 1920년 10월 14일이었다. 그러나 며칠후에 유관순 열사의 묘지에 가보니 묘소가 흔적도 없이 파헤쳐져 시체가 온데간데가 없었다 한다. 일 관헌이 시체를 인도할 때 화장할 것을 종용햇다니 시체를 파헤쳐 인멸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불을 보는 것처럼 명확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출처 : [기타] 천안독립운동사 - 천안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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