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태 (安益泰, 1906~1965)
작곡가, 지휘자, 첼로 연주자.
1906. 12. 5 평남 평양~1965. 9. 16 스페인 마요르카.
어린시절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풍금과 악보 등을 보면서 음악을 접했다. 평양 출생이며 6세 때 동리 예배당의 찬송가에 이끌려 음악수업을 시작하여 그 뒤 선교사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1913년 큰형 익삼이 그에게 스즈키[鈴木] 바이올린을 사주어 처음 바이올린을 접했으며, 1914년 평양 종로보통학교에 입학하여 트럼펫과 바이올린을 배웠다.
1918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첼로 수업을 시작하였다. 숭실전문학교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했고, 숭실전문학교 교장 마우리의 주선으로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G. 게오르게로부터 첼로를 배웠다. 1919년에 3·1운동에 가담, 숭실중학교에서 퇴교당하고, 당시 교장인 마우리(Mowry,E.M.) 박사의 배려로 1921년 도쿄[東京] 세이소쿠중학교(正則中學校)에 음악 특기자로 입학하였다.
1926년 구니다찌 음악학교[國立音樂學校]에 입학하여 첼로를 전공하여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계속하였는데, 당시 김원복(金元福)·홍성유(洪盛裕) 등과 함께 다녔다. 방학중에 귀국하여 서울·평양 등에서 첼로 독주회를 가지기도 했다. 193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신시내티 음악학교에 입학하였고 작곡 공부를 위해 필라델피아음악대학 3학년에 편입했다.
음악학교 예과에 입학한 뒤 여름방학 동안에는 국내에 돌아와 연주활동을 하는 등, 당시 국내 음악계에 서양음악에 대한 관심을 유발하는 자극을 주었다. 평양에서 YMCA의 이상재(李商在)·조만식(曺晩植) 등을 알게 되어 애국운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1년 구니다치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서울 등지에서 독주회를 가졌는데, 이때의 연주 곡목은 하이든(Haydn,J.)의 첼로협주곡, 슈트라우스(Strauss,R.)의 첼로소나타 등이었다.
1932년 미국 신시내티음악학교로 유학하는 한편, 신시내티교향악단의 첼로주자로 입단하여 동양인 최초의 주자가 되었다. 그 뒤 필라델피아 교향악단에도 입단하였으며, 신시내티, 필라델피아 등지에서 첼로독주회를 가졌다. 1934년 유럽으로 가서 독일·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지휘 및 작곡을 공부하였으며, 헝가리 등지도 여행하며 수업하였다. 1935년 6월에 필라델피아음악대학을 졸업하였고, 커티스 음악학원에도 다니면서 F. 라이너에게 작곡과 지휘법을 배웠다.
1936년 필라델피아음악대학을 졸업하고 카네기홀에서 주관하는 작곡 콩쿠르에서 〈한국환상곡 Korea Fantasy〉이 입선되었으나 뉴욕 심포니오케스트라 단원의 거부로 낙선되었다.
1936년 유럽으로 건너가 베를린에서 〈애국가〉를 작곡하여 미국·일본·중국 등지에 있는 교포들에게 발송했다. 그후 오스트리아에서 F. 바인가르트너에게 베토벤 음악을 배웠고, 1937년 헝가리에서 코다이의 음악지도를 받으면서 〈한국환상곡〉을 수정했다. 〈한국환상곡〉은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국립교향악단의 연주로 처음 연주되었다.
그뒤 다시 빈으로 돌아와 R. 슈트라우스의 손녀를 구출해준 것이 계기가 되어 1940년 슈트라우스의 총애를 받는 제자가 되었고, 유럽 각국의 오케스트라로부터 초청지휘를 받으면서 지휘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1946년 7월 5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롤리타와 결혼하여 마요르카 섬에 정착하여 마드리드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으며 영국, 이탈리아, 미국등의 저명한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하기도 하였다. 그곳에서 1947년 오케스트라를 조직해서 연주회를 가졌고, 스페인 정부로부터 영주권도 받았다.
미국에서 지휘하려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중 나치에 협력한 슈트라우스의 수제자였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가 그후 2년 만에 입국허가를 받아 필라델피아에서 지휘했다. 1945년 제2차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스페인 마요르카에 정착, 교향악단을 지휘하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가 작곡한 〈애국가〉가 정식국가로 채택되었으나 정작 그는 이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런던·남미·미국 등의 교향악단에서 객원지휘하였다.
1955년 2월 19일 한국을 떠난 지 25년 만에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일 축제를 위한 특별초청을 받아 귀국했다. 1959년에 귀국하여 KBS교향악단, 시립교향악단을 지휘하고, 그뒤 한국을 드나들면서 국립교향악단의 조직과 국제음악제 준비를 서둘렀으나 교향악단은 결국 조직하지 못했다. 1961년 다시 귀국하여 국제음악제를 개최토록 하였으며 1962년에는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에서 지휘하였으며, 그 뒤 제2회부터 제4회까지 국제음악제를 주도, 지휘하였다. 1964년 한국에 정착하기 위한 준비를 하려고 스페인으로 돌아갔다가 1965년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병사했다. 1957년 문화포상을 받았으며 1965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주요작품으로는 〈애국가〉·〈한국환상곡〉 이외에도 〈강천성악 降天聲樂〉(1959)·〈진혼곡〉(1962)·〈논개〉(1962) 등이 있고, 저서로 〈R. 슈트라우스의 전기〉·〈R. 슈트라우스 서한집〉이 있다.
[ 안익태의 연표 ]
1906년 12월 5일 평남 평양
1912년 동리 예배당의 찬송가에 이끌려 음악수업을 시작.
선교사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움.
1913년 큰형 익삼이 그에게 스즈키[鈴木] 바이올린을 사주어 처음 바이올린을 접함.
1914년 평양 종로보통학교에 입학.
트럼펫과 바이올린을 배움.
1918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첼로 수업을 시작.
1919년 3·1운동에 가담, 숭실중학교에서 퇴교당함.
1921년 도쿄[東京] 세이소쿠중학교(正則中學校)에 음악 특기자로 입학.
1926년 구니다찌 음악학교[國立音樂學校]에 입학.
첼로를 전공하여 본격적인 음악수업 받음.
193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신시내티 음악학교에 입학.
작곡 공부를 위해 필라델피아음악대학 3학년에 편입.
1931년 구니다치음악학교를 졸업.
동경·서울 등지에서 독주회를 가짐.
1932년 미국 신시내티음악학교로 유학.
신시내티교향악단의 첼로주자로 입단.
동양인 최초의 주자가 됨.
1934년 유럽으로 가서 독일·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지휘 및 작곡을 공부.
헝가리 등지도 여행하며 수업.
1935년 6월에 필라델피아음악대학을 졸업.
커티스 음악학원에도 다니면서 F. 라이너에게 작곡과 지휘법을 배움.
1936년 필라델피아음악대학을 졸업.
카네기홀에서 주관하는 작곡 콩쿠르에서 <한국환상곡>이 입선.
그러나 뉴욕 심포니오케스트라 단원의 거부로 낙선.
유럽으로 건너가 베를린에서 <애국가>를 작곡.
바인가르트너에게 베토벤 음악을 배움.
1937년 헝가리에서 코다이의 음악지도를 받으면서 <한국환상곡>을 수정.
<한국환상곡>은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국립교향악단의 연주로 처음 연주.
1940년 슈트라우스의 총애를 받는 제자가 됨.
유럽 각국의 오케스트라로부터 초청지휘를 받으면서 지휘자로서 명성을 떨침.
1945년 제2차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스페인 마요르카에 정착, 교향악단을 지휘.
1946년 7월 5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롤리타와 결혼.
마드리드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됨.
영국, 이탈리아, 미국등의 저명한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하기도 함.
1947년 오케스트라를 조직해서 연주회를 가졌고, 스페인 정부로부터 영주권도 받음.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애국가>가 정식국가로 채택.
1950년 런던·남미·미국 등의 교향악단에서 객원지휘함.
1955년 2월 19일 한국을 떠난 지 25년 만에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초청을 받아 귀국.
1957년 문화포상을 받음.
1959년 KBS교향악단, 시립교향악단을 지휘.
1961년 국제음악제를 개최토록 함.
1962년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에서 지휘.
1964년 한국에 정착하기 위한 준비를 하려고 스페인으로 돌아감.
1965년 9월 16일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병사함.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됨.
[ 참고사항 ]
안익태 선생의 친필 사인이 담겨 있는 사진이다.
안익태 선생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안익태 선생이 1955년 25년 만에 고국을 방문해 음악인들과 한 클럽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가운데 검정색 외투를 입고 서 있는 사람이 안익태.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안익태와 절친한 작곡가 박태현이다.
사진 아래쪽에 단기4288년(1955년) 4월 2일이라는 메모가 눈에 띈다.
25년 만의 한국방문 마치고 떠나는 안익태 를 위하여 동료 음악인들이
4월 26일 마련한 송별회 모습이다. 사진 가운데 검정 양복 차림이 안익태.
안익태가 1955년 출국에 앞서 4월 28일 찍은 사진이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안익태.
그 바로 옆에 작곡가 박태현의 모습이 보인다.
단기 4293년(1960년) 3월 10일
반도호텔에서 안익태, 박태연 등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가운데가 안익태, 맨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작곡가 박태현이다.
문화포장을 수여받고 이승만 대통령 옆에 서 있는 안익태
1962년 안익태 선생이 애국가의 원곡인 '한국 환상곡'을 지휘하는 모습
안익태 귀국 환영식 (촬영일:1960-03-09)
출처 : 엠파스 백과사전
서울시 언론담당관
흥국생명 세상엿보기 / 김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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