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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역사/유적/국내 관련

[우리나라 역사] 고조선, 위만조선 고조선 BC 108년까지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존재한 한국 최초의 국가.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朝鮮)을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그뒤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 용어가 널리 쓰였다. 지금은 단군이 건국한 조선과 위만조선을 포괄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고조선의 건국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단군신화에서는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기술하였으나, 그대로 믿기 어렵다. 건국연대를 위로 끌어올린 이유는, 역사가 오래될수록 그 왕조는 권위가 있으며 민족도 위대하다는 인식의 반영에 불과하다.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이다. .. 더보기
[삼국시대] 계백장군과 김유신장군에 대해.. 계백장군 ■?∼660(의자왕 20) ■ 백제 말기의 장군 황산벌의 한 / 나라와 더불어 죽은 자 ▶ 황산벌의 한 계백(伯)이라고도 표기한다. 관등은 달솔(達率)이다. 660년 김유신(金庾信)과 소정방(蘇定方)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지금의 大田 동쪽 馬道嶺)과 백강(白江)으로 진격해오자, 결사대 5천인을 뽑아 거느리고 황산(黃山:지금의 連山)벌에 나가 5만여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그는 전장에 나아가기에 앞서 “한 나라의 힘으로 나·당의 큰 군대를 당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보는 것이 흔쾌히 죽어 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고는 처자를 모두 죽이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하였다. 또한, 병사들에게도 “옛날 월왕(越王.. 더보기
[백제] 계백 장군은 어떤 인물이었나? 60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은 영토 다툼으로 한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지러운 상황을 맞이하였다. 삼국은 중국을 오갈 수 있는 중요한 교통로인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치열한 싸움을 계속했다. 계백은 백제 말기 장군으로, 일찍이 벼슬길에 올라 660년(의자왕20)에 달솔이라는 벼슬에 있었다. 그 당시 백제는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상태였다. 백제는 북으로는 고구려, 남으로는 일본과 손을 잡고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다급해진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백제에 맞섰다. 그러나 백제의 의자왕은 그 무렵 연회만을 즐기고 나라일을 돌보지 않았다. 신라는 이 틈을 이용하여 660년 5만 명이 넘는 나당 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김유신과.. 더보기
김유신장군과 연개소문? [김유신] 본관 김해, 아버지는 소판·대량주도독을 역임한 서현, 어머니는 숙흘종의 딸 만명, 본래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12대손입니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이었고 조부는 신주도 행군총관을 지낸 명장 김무력이었습니다. 김유신은 609년(진평왕 31)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라 불린 낭도를 이끌고 화랑정신을 길렀고, 611년과 이듬해 중악과 인박산에서 삼국통일을 기원하고 무술을 닦은 뒤 국선이 되었습니다. 629년(진평왕 51) 8월 이찬 임영리 등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할 때 중당의 당주로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때 적군의 역습을 받은 아군의 사기가 떨어져 싸움이 불리해지자 아버지 소판 서현에게 "제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하고 홀로 적진으로 돌진하여 적장의 머리를 베어.. 더보기
선덕여왕 인물설명(김춘추, 비담)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 603∼661) : 신라 제29대 왕 즉위 전 성명은 김춘추(金春秋)이고, 진지왕의 손자로 이찬(伊飡) 용춘(龍春)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으로 진평왕의 딸이다. 비는 문명부인(文明夫人)으로, 각간(角干) 서현(舒玄)의 딸이자, 김유신의 누이동생인 문희(文姬)이다. 그의 용모는 백옥과 같고 영특하고 늠름하여 온화한 말씨로 말을 잘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릴 큰 뜻이 있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김춘추의 아버지를 용춘 또는 용수라고 하여 둘을 같은 이로 말하는데 반해, 『화랑세기』에는 용수와 용춘의 관계를 형제로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진평왕 44년(622년)에 이찬 용수를 내성사신으로 임명했다는 기록과, 진평왕 51년(629년) 파진찬 .. 더보기
[신라] 김유신의 업적은? 1.백제·고구려 정벌 신라는 6세기 이래 비약적인 팽창을 하여,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와 맺었던 나제동맹을 깨뜨렸습니다. 그러자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연합하여 신라를 위협했고(여제동맹), 신라는 중국(수와 당)과의 연결을 꾀하였습니다. 629년, 신라군이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할 때, 김유신은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고구려군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인생은 바로 이 때 꽃피기 시작한 것이죠. 641년,백제가 신라의 서쪽 40개 성을 함락하고 대량주(지금의 경남 합천이랍니다.)를 점령하자, 신라는 당시 적대국이었던 고구려에 김춘추를 보내 원병을 청하기로 했다가 고구려에 잡혀서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있었죠. 이때 김유신은, 고구려에 억류되었던 김춘추의.. 더보기
선덕여왕 드라마 원작 소설의 결말 미실의 최후 미실은 덕만에게 모든 사람을 잃습니다. 미실을 따르던 사람을 모두 덕만에게 잃습니다. 그리고 왕은 미실을 궁에서 나가라고 합니다. 미실은 결국 최후의 카드를 씁니다. 바로 자신의 아들, 비담 입니다. 비담은 , 왕이 되고 싶어합니다. 미실은 비담을 불러들러 자신을 죽이고 그 명예로 한단계 발전하라고 말합니다 비담은 결국 자신의 어머니인 미실을 죽입니다. 선덕여왕의 최후. 병에 걸립니다. 그리고 그 병이 악화됩니다. 선덕여왕이 병때문에 누워있을 때 비담이 염종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난을 일으킵니다. 바로 이때, 북극칠성의 별 하나가 떨어집니다. 비담은 승리를 확신하나, 유신에게 결국 죽음을 당합니다 이때 덕만도 홀로 병상에 누워 생을 마감합니다. ( 선덕여왕 드라마 원작 소설의 결말입니다,) 더보기
우리가 찾아야 할 간도 1712년 숙종 38년에 청과 조선이 백두산에 세운 정계비입니다. 청과 조선이 세웠다고 하나 사실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세운 비나 다름이 없지요. 그런데 이 백두산 정계비에는 '西爲鴨綠, 東爲土門'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이 서위압록, 동위토문이란 말은 서쪽은 압록강으로, 동쪽은 토문강으로서 분계선을 삼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토문강이란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흐르는 쑹화강의 한 지류인데 백두산 정계비의 말이 사실이라면 토문강의 동쪽인 지금의 연변지방, 즉 중국의 동북지방은 우리 한반도의 차지가 되야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정계비는 청나라에서 세운것과 다름이 없으니 중국 쪽에서도 간도지방이 우리 영토라는 것을 인정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 쪽에서는 또 말을 바꾸어 '토문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