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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역사/유적

[우리나라 역사] 백제 왕실 연대표 백제시대(百濟, B.C 18~A.D660 , 678년간, 총31대) 代 왕명 재위기간 약사 1 온조왕(溫祚, ?~28) B.C 18~A.D 29 고구려 동명왕의 세째아들(혹은 둘째). 위례성에 나라를 정하고 나라이름을 백제라함. BC 5년에 서 울을 한산(지금의 광주)으로 옮김. AD8년 마한을 병합함. 2 다루왕(多婁, ?~77) 28~77 온조왕아들. 말갈족을 격퇴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백성 생활을 안정 시켰 음. 37년 후한의 낙랑군을 멸망시킴. 3 기루왕(己婁, ?~128) 77~128 다루왕의 맏아들. 4 개루왕(蓋婁, ?~166) 128~166 기루왕의 아들. 132년에 북한상성을 쌓음 5 초고왕(肖古, ?~214) 166~214 개루왕의 아들. 신라를 여러번 침공하고, 210년에 적현성, 사.. 더보기
[우리나라 역사] 고구려 왕실 연대표 고구려시대(高句麗, B.C 37 ~A.D 668, 705년간, 총28대) 代 왕명 재위 기간 약사 1 동명성왕 (東明聖王) B.C 58~B.C 19 B.C 37 ~ B.C 19 성은 고(高), 원래 성은 해(解). 휘는 주몽(朱蒙).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와배다른 형제라고도 한다. 동부여(동부여)의 금와의 아들 대소의 모해를 피하여 압록강 연안인 졸본천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졸본부여)라 함. 2 유리왕(榴璃, ?~18) B.C 19 ~ A.D 18 성은 해(解). 휘는 유리(榴璃). 동명성왕 아들. 왕22년에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기고 왕33년에 한(漢)나라의 고구려현을 빼앗음. 유리명왕(榴璃明) 3 대무신왕(大武神, 4~44) 18~44 성은 해(解). 유리왕 셋째아들. 휘는 무휼(無恤). 동부여.. 더보기
[역사] 기자조선 기자조선 중국 은나라 말기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건국하였다고 하는 나라.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일부 족보에 자주 등장하는 나라이므로 참고로 보시면 됩니다.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대표적인 역사책은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 등인데, 사서마다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그 밖의 기자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이들 세 사서에 그 유래와 근거를 두고 있다. 《상서대전》에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하자, 그는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주의 책.. 더보기
[우리나라 역사] 고조선, 위만조선 고조선 BC 108년까지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존재한 한국 최초의 국가.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朝鮮)을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그뒤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 용어가 널리 쓰였다. 지금은 단군이 건국한 조선과 위만조선을 포괄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고조선의 건국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단군신화에서는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기술하였으나, 그대로 믿기 어렵다. 건국연대를 위로 끌어올린 이유는, 역사가 오래될수록 그 왕조는 권위가 있으며 민족도 위대하다는 인식의 반영에 불과하다.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이다. .. 더보기
[삼국시대] 계백장군과 김유신장군에 대해.. 계백장군 ■?∼660(의자왕 20) ■ 백제 말기의 장군 황산벌의 한 / 나라와 더불어 죽은 자 ▶ 황산벌의 한 계백(伯)이라고도 표기한다. 관등은 달솔(達率)이다. 660년 김유신(金庾信)과 소정방(蘇定方)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지금의 大田 동쪽 馬道嶺)과 백강(白江)으로 진격해오자, 결사대 5천인을 뽑아 거느리고 황산(黃山:지금의 連山)벌에 나가 5만여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그는 전장에 나아가기에 앞서 “한 나라의 힘으로 나·당의 큰 군대를 당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보는 것이 흔쾌히 죽어 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고는 처자를 모두 죽이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하였다. 또한, 병사들에게도 “옛날 월왕(越王.. 더보기
[백제] 계백 장군은 어떤 인물이었나? 60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은 영토 다툼으로 한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지러운 상황을 맞이하였다. 삼국은 중국을 오갈 수 있는 중요한 교통로인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치열한 싸움을 계속했다. 계백은 백제 말기 장군으로, 일찍이 벼슬길에 올라 660년(의자왕20)에 달솔이라는 벼슬에 있었다. 그 당시 백제는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상태였다. 백제는 북으로는 고구려, 남으로는 일본과 손을 잡고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다급해진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백제에 맞섰다. 그러나 백제의 의자왕은 그 무렵 연회만을 즐기고 나라일을 돌보지 않았다. 신라는 이 틈을 이용하여 660년 5만 명이 넘는 나당 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김유신과.. 더보기
김유신장군과 연개소문? [김유신] 본관 김해, 아버지는 소판·대량주도독을 역임한 서현, 어머니는 숙흘종의 딸 만명, 본래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12대손입니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이었고 조부는 신주도 행군총관을 지낸 명장 김무력이었습니다. 김유신은 609년(진평왕 31)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라 불린 낭도를 이끌고 화랑정신을 길렀고, 611년과 이듬해 중악과 인박산에서 삼국통일을 기원하고 무술을 닦은 뒤 국선이 되었습니다. 629년(진평왕 51) 8월 이찬 임영리 등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할 때 중당의 당주로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때 적군의 역습을 받은 아군의 사기가 떨어져 싸움이 불리해지자 아버지 소판 서현에게 "제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하고 홀로 적진으로 돌진하여 적장의 머리를 베어.. 더보기
선덕여왕 인물설명(김춘추, 비담)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 603∼661) : 신라 제29대 왕 즉위 전 성명은 김춘추(金春秋)이고, 진지왕의 손자로 이찬(伊飡) 용춘(龍春)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으로 진평왕의 딸이다. 비는 문명부인(文明夫人)으로, 각간(角干) 서현(舒玄)의 딸이자, 김유신의 누이동생인 문희(文姬)이다. 그의 용모는 백옥과 같고 영특하고 늠름하여 온화한 말씨로 말을 잘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릴 큰 뜻이 있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김춘추의 아버지를 용춘 또는 용수라고 하여 둘을 같은 이로 말하는데 반해, 『화랑세기』에는 용수와 용춘의 관계를 형제로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진평왕 44년(622년)에 이찬 용수를 내성사신으로 임명했다는 기록과, 진평왕 51년(629년) 파진찬 .. 더보기